일본인 ‘한글 전도사’ 노마 히데키 씨… “한글은 지적 혁명… 인류 자산으로 보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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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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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문자로 만든다는 발상 혁명 말곤 설명 안돼 민족주의 입장 떠나 보편적으로 알려야 한글 발전”

“한글은 전율 넘치는 지적(知的) 혁명입니다. 인류 전체의 귀중한 자산이에요.”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연구하고 사랑하는 일본인이 있다. 노마 히데키(野間秀樹·57) 전 일본 도쿄외국어대 대학원 교수. ‘일본인 한글 전도사’를 26일 만났다.

―어떻게 한글과 인연을 맺게 됐나.

“대학 시절 독학으로 한글을 공부하다 매력에 푹 빠졌다. 1983년 서른 나이에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인 한글 전도사’ 노마 히데키 씨가 자신의 책 ‘한글의 탄생-음(音)에서 문자를 만들다’를 들고 한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일본인 한글 전도사’ 노마 히데키 씨가 자신의 책 ‘한글의 탄생-음(音)에서 문자를 만들다’를 들고 한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원래 그는 예술가였다. 1970년대 현대일본미술전에서 상도 받았고 1979년엔 서울과 도쿄에서 공동 전시회를 연 한일 작가 7명의 멤버이기도 했다. 이런 그가 작가의 길을 접고 한글학자로 변신한 것이다.

―미(美)적인 관점에서 한글을 평가한다면….

“한글은 15세기 당시 전통적인 문자의 미에서 벗어난, 굉장히 논리적인 구조의 미를 갖고 있다. 자음과 모음을 나타내는 여러 요소를 합쳐서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글의 탄생은 산수화의 세계에 컴퓨터그래픽이 등장한 것처럼 파격적이다.”

―한글의 어떤 점이 우수한가.

“한글의 탄생은 15세기의 지적 전통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혁명 그 자체다. 소리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발상은 그 시대 언어사에선 획기적이다. 한글 창시자들은 소리 중에서 의미와 관계되는 모든 요소에 분명한 형태를 줬다. 이것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 즉 초성 중성 종성과 지금은 표기가 없어진 성조다. 하나의 음절을 이처럼 네 가지로 분석하는 사분법은 완전히 현대언어학 수준이다.”

―한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지적 혁명이다. 1000년 한자의 역사에서 한글이 탄생했다는 건 지적 혁명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엔 태어날 때부터 100% 한자를 기초로 한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을 말하면 ‘山’이란 한자가 머리에 떠오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한자를 떠나선 개념화가 불가능했다. 지(知) 자체가 한자였다. 훈민정음은 이 모든 것을 자음과 모음으로 해체했다. 지의 최소단위까지 해체해 새로운 문자를 만듦으로써 지의 근간을 바꾼 것이다.”

23일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열린 ‘한글의 세계-기적의 문자 그리고 지적 혁명’ 강연에서도 그는 ‘혁명’ ‘기적’이란 말을 거듭 강조했다. 일본인이 대부분인 청중 250명은 한글의 탄생과 원리, 독창성에 감탄하면서 때론 박수를 보냈다.

―한글이 다른 문자와 특히 다른 점은 뭔가.

“한글은 ‘나는 이런 문자다. 누구를 위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고, 나를 이렇게 발음해 달라’는 점을 스스로 밝힌 세계 유일의 문자다. 훈민정음에선 소리가 문자로 되는 근원을 접할 수 있다. 발성기관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근원으로 들어가서 형태를 찾아낸 것이다. 한글 스스로 이론무장을 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훈민정음에 남아 있다.”

―한글 창제에 반대도 많았는데….

“정음혁명파와 한자한문원리주의의 투쟁이 격심했다. 한자한문원리주의자인 최만리는 ‘소리를 이용해 문자를 만든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비판했다. 용음합자(用音合字·소리를 이용해 문자를 만든다)라는 말 속에 반대파도 한글의 원리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정음혁명파인 정인지(鄭麟趾)는 ‘하늘과 땅 사이에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글이 있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했다. 권력 심장부인 왕궁에서 정치투쟁이 아니라 이런 지적 투쟁이 있었다는 게 대단하지 않나.”

그가 올 5월 출간한 책 ‘한글의 탄생-음(音)에서 문자를 만들다’는 마이니치신문사와 사단법인 아시아조사회가 주관하는 ‘아시아태평양 대상’에 선정됐다. 다음 달 15일 시상식이 열린다. 심사위원회는 “한글이 음소, 음절, 형태소라는 세 요소를 분명한 형태로 나타낸 지극히 정교한 문자라는 점을 동아시아문화사 속에서 그려냈다. 이 세 요소는 모두 현대언어학의 개념인데, 한글 창제자들이 15세기에 이미 이를 자유자재로 썼다니…”라고 평가했다.

―한글 발전을 위해 조언해 달라.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한글이 최고다. 세종대왕 훌륭하다’라고 하는 것보다 보편적 객관적으로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저절로 한글의 진가가 돋보인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자산이니까.”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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