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살인마의 생명도 존중 받아야”

  • 입력 2009년 8월 20일 03시 03분


19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사형제도의 위헌성과 세계적 추이’를 주제로 열린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허일태 동아대 교수(오른쪽)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19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사형제도의 위헌성과 세계적 추이’를 주제로 열린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창립 2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허일태 동아대 교수(오른쪽)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이상혁 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장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자라고 해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이상혁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사폐협) 회장(74·고시 사법과 10회·사진)은 19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사폐협 창립 20주년 기념 세미나에 앞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우리나라가 진정한 인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공적살인(公的殺人)’ 제도를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1989년 5월 사폐협을 창립한 이 회장은 20년간 정부를 상대로 사형 반대운동을 펼쳐 ‘한국 사형폐지 운동의 대부’로 불리고 있다. 그가 사형 폐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5년 17명을 연쇄 살해한 김대두의 국선변호를 맡으면서부터였다.

“어른은 내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어린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아서 죽였다”고 밝혔던 김대두는 1976년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뒤 이 회장의 교화와 설득 끝에 죄를 뉘우치고 평온한 얼굴로 사형대에 올랐다. 이 회장은 “이 사건을 통해 아무리 끔찍한 살인마라도 충분히 교화할 수 있고 이들 하나하나도 소중한 목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살인사건 피해자 유가족들의 항의 전화를 받을 때가 가장 가슴이 아프다”며 “피해자의 목숨도 소중하지만 사형수들의 생명도 똑같이 존엄하며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형 폐지 운동을 시작하며 10년이면 사형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2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다”며 “사형보다 감형 없는 종신형이 범죄 예방효과가 더 클 수 있어 굳이 극형인 사형제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로 정부가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한국이 ‘사실상의 사형폐지국’으로 인정받는 기틀을 놓았다”며 “스스로 사형수였던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의 참혹함과 인권침해 가능성에 대해 잘 알고 이를 개혁하려고 한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이날 ‘사형제도의 위헌성과 세계적 추이’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는 허일태 동아대 교수가 1995년 사형제에 위헌 결정을 내린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분석하고, 박용철 서강대 교수와 김용세 대전대 교수가 각각 미국 및 일본의 사형제에 대해 발표했다.

허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남아공과 헝가리의 헌법재판소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는 이유로 사형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속속 내놓고 있다”며 “현재 사형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53개국이지만 해마다 줄어들어 한국도 사형 폐지를 본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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