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홍종우. 지향이 같되 길이 다른 두 사람은 이렇듯 생(生)과 사(死)도 엇갈려야 했다.
김옥균은 한중일 3국이 합쳐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주창한 동아시아 공동체주의자였다. 또 일본의 힘을 빌려 조국을 근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홍종우는 38세에 파리로 간 인텔리다. 개화사상에서는 김옥균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이 중심이 되는, 국왕이 주도하는 주체적 근대화에 매달렸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사살한 뒤 경찰에 끌려가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라고 소리쳤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김옥균을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처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조선에 돌아온 홍종우는 고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조정의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외국 군대 철수와 대한제국 연호의 화폐 유통을 추진했다.
그러나 홍종우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빌미로 조선을 더욱 압박했다. 내부적으로는 개화와 관련한 논의구조마저 사라져 버렸다.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홍종우 역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 왕정제의 부조화를 읽는 데 실패한 셈이다.
김옥균과 홍종우의 대결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채 끝나지 않은 듯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외교정책은 친미냐 자주냐를 놓고 홍역을 치렀다. 역사학계에서는 홍종우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활발했다.
반면 얼마 전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의 모임인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김옥균을 근대화를 추구한 선각자로 묘사했다. 그간 따라붙었던 친일파 딱지도 떼었다.
어쩌면 김옥균과 홍종우가 남긴 유산은 이 땅이 천형(天刑)처럼 지고 가야 할 짐인지도 모른다. 도포 차림의 개화사상가 홍종우가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또 다른 개화사상가 김옥균을 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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