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사람 찾는 항의전화는 내 몫… ‘스토커’ 해결사까지

  • 입력 2007년 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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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끊지 마십시오. 전화상담원 맞습니다.”

이헌진(33·사진) 씨는 남자 전화상담원이다. 2002년 6월 생활정보서비스 기업인 ‘코이드’에 입사한 뒤 줄곧 KT 대구 고객센터에 파견돼 4년 7개월째 전화상담을 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가 궁금해 직접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굵은 톤의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잘못한 것 같았다.

수화기 저편에서 “맞습니다”는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맞습니다’는 사실 이 씨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제가 전화 받으면 끊는 고객들 많습니다. 끊을 때 저쪽에서 말은 안 하지만 ‘아니, 남자 상담원이 다 있나’ 하는 그런 느낌도 자주 받아요. 그리고 끊지는 않더라도 KT고객센터 맞느냐고 2, 3번씩 물어보시죠. 그럴 때마다 ‘맞다’고 해야죠.”

상담원은 ‘도레미파솔’의 솔 톤으로 상담을 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이 씨는 편하게 하기로 했다. 굵은 톤의 목소리는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씨는 스스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전 세대 커버’용 목소리다.

이 씨는 동료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통한다.

KT 고객센터에는 ‘이상한’ 남자들이 전화해서 집요하게 특정 여성 상담원을 바꿔 달라고 할 때가 많다. 하루에 10번 넘게 전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땐 이 씨가 전화를 받아 “자꾸 이렇게 전화하시면 곤란하다”고 한마디 하면 상황 끝이다.

그가 해결사로 나서는 때는 또 있다.

‘전화 요금 못 내겠다’는 등의 항의성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그때마다 이 씨가 나선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무기로 과장급도 됐다가 국장급도 됐다가 하면서 고객을 구슬리는 역할을 한다.

그는 “화가 난 고객들이 무턱대고 높은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면서 “화가 난 고객도 여성상담원이 아니라 과장, 국장이 나섰다고 생각하면 조금 누그러진다”고 말했다.

이 씨는 2명의 남자와 함께 입사했다. 하지만 항의성 전화를 받는 스트레스를 못 이겨 다른 2명은 1, 2년 사이에 퇴사했다.

그러다 보니 이 씨 사무실에 남자직원이라고는 전산 담당 직원 하나뿐이다. 여성상담원이 대부분 이 씨보다 나이가 어려 ‘만인의 오빠’로 불린다.

처음에는 이 씨와 동료 여성상담원들이 서로 불편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휴게실 옆 소파에서 여성상담원이 누워 쉬고 있어도 아랑곳 않고 잘 잔다. 물론 동료 여직원들도 이 씨의 존재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친구들은 꽃밭에서 일한다고 부러워하지만 동료들이 받기 힘든 전화를 내가 받아야하고, 무거운 짐 옮길 때 반드시 나서야 하는 고충도 있다”며 웃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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