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56년 어사 박문수 사망

  • 입력 2006년 4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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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의 횡포와 착취가 그칠 줄 모르는 조선시대의 한 고을. 백성들은 이유 없이 재산을 빼앗기고 매를 맞지만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다. 사또는 오늘도 고을의 양반들을 불러 모아 술과 기녀들을 끼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

허름한 행색으로 잔칫상 주변을 기웃거리던 한 청년의 눈빛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암행어사 출두야!”

수십 명의 포졸이 육모 방망이를 휘두르며 나타나 사또를 포박했다. 청년은 늠름한 자태로 동헌 높은 자리에 올라 사또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곳간은 열리고 그날부터 백성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의 활약상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이야기다.

1691년(숙종 17년) 태어난 박문수는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史官), 병조정랑,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어영대장, 호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당쟁에 휘말려 귀양살이도 했지만 그는 후세 사람들에게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고유명사로 각인돼 있다.

암행어사란 임금의 명을 받고 신분을 숨긴 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지방 관리들을 감독하는 직책. 암행어사는 파견 지역에 도착한 뒤 또는 서울을 벗어난 후에야 임금이 내린 어찰을 뜯어볼 수 있었다. 임금의 밀지가 사전에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509년 중종이 처음 파견한 이후 400년 가까이 수많은 암행어사가 탐관오리 척결에 나섰다. 1892년 고종이 전라도에 파견한 이면상(李冕相)이 마지막 암행어사다.

그럼에도 유독 박문수의 무용담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까닭이 뭘까. 무엇보다 그가 워낙 청렴결백하고 지혜롭게 임무를 수행한 데다 암행어사를 여러 차례 지내면서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울러 다른 암행어사의 행적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야기로 합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사가(史家)들의 분석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영조시대의 고소설 ‘어사 박문수전’ 이후 숱한 설화와 소설이 전해진다.

1756년 4월 24일 세상을 떠난 암행어사 박문수의 이야기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드는 것은 아직도 ‘암행어사 출두’가 절실한 곳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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