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性洙선생 추모식]“암흑의 시대 독립의 힘 키운 선각자”

  • 입력 2005년 2월 18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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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없는 신문을 이끌었던 언론인.

옛것을 받아 새것을 만들어낸 교육자.

민족 자본 육성에 앞장선 기업인.

백성들의 머슴을 자처했던 부통령.

18일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유택 앞에서 거행된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5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은 고인이 언론 교육 등의 분야에서 남긴 발자취를 더듬으며 고인을 추모했다.

18일 인촌 김성수 선생 50주기 추모식이 열린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고인의 유택 앞에서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각계인사들이 고인을 기리는 묵념을 올리고 있다. 남양주=박경모기자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은 교육자로서의 인촌을,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의 인촌의 업적을 기렸다.

김 전 대통령은 “인촌 선생은 광복 직후 한민당을 창당하고 부통령을 맡으시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지대한 역할을 하셨다.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홍구(李洪九) 전 국무총리와 인촌기념회 이사장인 현승종(玄勝鍾) 전 국무총리는 고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이 전 총리는 “조국 근대화와 건국 과정에서 조용하게 많은 역할을 하신 분”이라며 “이번 추모식은 지도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자리”라고 말했다.

현 전 총리도 “그분은 어려웠던 시절 나라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각자”라며 “요즘처럼 나라가 어려운 고비에 처해 있을 때는 인촌 선생의 지도력이 더더욱 그리워진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건국 초기 대학교수들이 좌우로 갈려 격론을 벌이면 총장이 발언을 자제시키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이를 듣고 있던 인촌 선생이 자유토론을 막지 말라고 하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선생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홍일식(洪一植·전 고려대 총장) 세계효문화본부 총재는 일제강점기의 인촌 선생에 대해 “마치 무더운 여름날 병아리를 품고 있는 어미닭이 어린 병아리가 다칠까봐 날갯짓 한번 시원하게 못하듯 어려운 시절에도 조용하게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홍 총재는 “호수의 물이 잔잔하면 산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지만 바람이 불어 일렁이면 산의 실체와 달리 이지러져 보인다”며 “인촌의 참모습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정호(崔禎鎬) 울산대 석좌교수는 “1952년 인촌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치에 항의하며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언론(大言論)을 펼치고 물러났다”며 “대학에 갓 입학했던 우리들은 국회에 제출한 부통령의 사직서를 비밀문서처럼 손으로 베껴 서로 돌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최 교수는 이어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1955년 2월 인촌의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며 “인촌의 덕량(德量) 앞에 우남(雩南·이승만의 호)의 권력이 고개를 숙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정식 “모진 고난 겪으면서도 조선민족의 얼 일깨워”▼

인촌 선생이 각 방면에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중앙학교를 맡아서 교육사업에 투신했고, 중앙학교와 자기 숙소를 3·1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동아일보사를 만들어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선봉에 섰으며, 보성전문학교를 맡아 고등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에 많은 인물이 두각을 나타냈지만 인촌 선생같이 여러 분야에서 빛을 발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적도 공적이지만 제가 인촌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선각자였고 선구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촌 선생과 그의 벗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가 1915년에 중앙학교를 맡아 민족교육에 헌신한 의의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저 부잣집 아들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할 일이 없으니까 학교를 하나 인수해서 경영했겠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촌 선생은 대지주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지주들이 전통을 깨는 신식학교를 인수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의 일을 하겠다는 요청에 동의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24세이던 그는 학교 인수자금을 얻기 위해 자기 방문을 첩첩으로 잠가 놓고 사흘이나 단식투쟁을 결행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전국에 고등보통학교가 넷밖에 불과한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명감을 갖고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겠다는 것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을 위한 힘을 키우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인촌 선생이 같은 사명감을 갖고 동아일보를 창간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입니다. 초기부터 정간, 삭제, 구금 등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우매한 백성들을 일깨워 민족의 얼을 넣어 주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가다가 결국 폐간까지 당했습니다. 중앙학교, 보성전문, 동아일보 등은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사업들이었습니다. 경성방직도 역시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암흑시대에 우리 겨레를 이끌었던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노(No)’라고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상실한 그들이 자기의 긍지를 손상시키는 일까지 감수해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끌어 오던 단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 옥쇄를 각오하지 않는 한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일제의 발악적 전체주의 시대에도 조선민족으로서의 좌표를 잃지 않고 민족을 이끌어 갔던 인촌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명감과 인내력, 그리고 정열과 의지를 본받아 민족의 도약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니아대 명예교수

▼이철승 “日帝의 학병권유 강요 거부하시던 모습 선해”▼

올해는 광복 60주년이요, 선생님이 가신 지 50주년이 됩니다. 선생님이 가실 때 저희 후학들은 선생님의 유덕(遺德)을 받들고 그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한 바 있습니다. 그러던 제가 모든 정치현역에서 떠나 이 나이가 된 시점에서 무엇 하나 선생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일본 총독 정치의 발악이 극에 달해 창씨개명, 일어 사용 강요, 강제 징용 등을 강행할 당시 선생님은 민족 언론인 동아일보를 경영했습니다. 또 경성방직을 창업하고 백년대계의 입장에서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을 운영했습니다. 민족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기약 없는 조국의 광복과 독립의 기반을 조성했던 것입니다.

일본 고이소 총독이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에게 학병 권유를 강요할 때도 인촌 선생은 “나는 학부모들로부터 교육을 맡아 달라고 학생들을 맡았지, 전쟁터에 보내라고 맡은 바가 결코 없다”고 하면서 괴로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선생님은 해방정국에서 민족진영의 총의에 따라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미유대관계를 조성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국으로서 자유와 번영을 구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오늘의 국가위기 상황하에서 부통령직까지 내던지며 올바른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 선생님의 존재가 얼마나 컸던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없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 대한민국의 영원한 스승으로서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 주셨던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삼가 추모사를 올립니다.

이철승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

▼추모식 참석자 명단▼

▽정관계=황인성 이홍구 이한동 전 총리, 권오기 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오정소 전 국가보훈처 장관, 손학규 경기지사, 강인섭 고재청 김진배 박경석 손세일 양창식 양해준 유준상 장성원 전 의원, 유도재 전 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 안현태 김광석 전 대통령경호실장, 동훈 남북평화통일연구소장, 이승환 전 그리스대사

▽경제계=김상하 삼양사그룹 회장, 김명하 김앤리 커뮤니케이션즈 회장, 정장호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회장, 김봉은 전 장기신용은행 회장, 김진호 전 한국토지공사 사장, 박상은 전 iTV 회장, 김담 경방 전무, 권이상 경방 감사

▽학계=현승종 인촌기념회 이사장,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김정배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기언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박종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안문석 고려대 부총장, 원우현 고려대 언론대학원 원장, 김중순 한국디지털대 총장, 오정훈 현인택 조광 현재천 김인묵 고려대 교수, 조도현 아주대 교수, 최덕 명지대 교수, 황필홍 단국대 교수

▽동아일보 및 언론계=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 이채주 전 동아일보 주필,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남중구 21세기평화연구소장, 최시중 한국갤럽 회장, 홍인근 김태선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동수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윤양중 동아일보 감사, 이상혁 변호사, 이현락 전 동아일보 주필, 여영무 남북전략연구소장, 박기정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김종심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정구종 동아닷컴 사장, 전만길 전 대한매일 사장, 황재홍 전 한국방송광고공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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