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총선 신당돌풍 이끌어…이민우 前신민당 총재 별세

  • 입력 2004년 12월 9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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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왼쪽)가 1985년 10월 12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가운데) 사저에서 김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과 회동했다. -연합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왼쪽)가 1985년 10월 12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가운데) 사저에서 김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과 회동했다. -연합
9일 타계한 이민우(李敏雨) 전 신민당 총재는 40년간의 정치 역정 내내 야당 외길을 걸었다. 독재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초중반에는 정통 야당의 맥을 이어 제1야당 당수에까지 올랐다.

이 전 총재는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3김’의 그늘에 가리긴 했지만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작지 않다.

1985년 12대 총선 직전 양 김 씨(YS, DJ)가 재건한 신민당의 총재를 맡아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중구에서 출마해 ‘신당 돌풍’을 주도하며 제1야당을 탄생시킨 때가 고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다.

고인은 직선제 개헌 논의가 한창이던 1986년 12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만난 뒤 ‘선(先) 민주화 조치, 후(後) 내각제 개헌’을 내용으로 한 ‘이민우 구상’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던 양 김 씨가 탈당하고 신민당이 와해되는 풍상을 겪었다. 고인은 당시 홍사덕(洪思德) 대변인의 정치적 조언을 주로 받았다. 이듬해 쓸쓸히 정계를 은퇴한 고인은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YS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나이는 아래였지만 선수(選數)는 위였던 YS와 함께 고인은 1960년대 민주당 구파에서 유진산(柳珍山) 선생이 주도한 진산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1980년대 초반 YS가 정치 규제로 묶이자 YS 주도의 민주산악회 회장을 맡았다. 신민당 총재가 된 것도 YS의 후견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이민우 구상’으로 독자노선의 조짐을 보인 이후 YS와 소원해졌다.

‘어진 돌’이라는 뜻의 호 인석(仁石)에 걸맞게 후덕하고 서민적인 풍모로 여야 정치인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41년 일본 메이지(明治)대 법학과를 중퇴했으며, 1958년 4대 민의원으로 국회에 첫발을 디뎠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동분 씨와 상용, 상래, 상호, 상렬 씨 등 4남 4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02-2072-2091). 발인 13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의정부시 녹양동 산 2.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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