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5인 후손 어떻게 지내나?

  • 입력 1999년 8월 13일 19시 40분


온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해 광복의 기틀을 다졌던 애국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민영환(閔泳煥·1861∼1905) 박승환(朴昇煥·1869∼1907) 안중근(安重根·1879∼1910) 유인석(柳麟錫·1842∼1915) 신채호(申采浩·1880∼1936) 등 이 땅에 ‘빛이 돌아오게 한’ 대표적 의사와 열사 등 5인의 후손을 찾아 생활실태와 근황 등을 추적했다. 서울대 신용하(愼鏞廈)교수를 비롯, 근현대사 전문가 5명의 추천을 받아 이들 독립투사들을 선정했다. 취재 결과 후손들 대부분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깊이 간직하고 선인의 뜻을 받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 민영환

충정공 민영환선생의 생존한 직계 자손은 차남 장식씨의 자녀인 병덕(丙德·74·경기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씨와 병진(丙鎭·62·안양시 중산구 호계동)씨 등 4명. 장남 범식씨의 자녀중 차남 병기(丙岐)씨는 프랑스대사를 지낸 뒤 85년 작고했다. 충정공 가문의 재산 대부분을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로채는 바람에 후손들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나라에 이바지한다’는 일념 하나로 생활해 왔다. 병덕씨는 전쟁이 끝난 뒤 젊은 시절부터 건설업에 뛰어들어 중견 건설업체 중역까지 지낸 뒤 15년전 은퇴했으며, 병진씨는 한국관광협회 부회장과 속초 뉴설악호텔 대표이사 등을 거치며 30여년간 호텔업계에 종사해 왔다. 충정공의 셋째 아들 광식씨의 아들 병섭 병건씨는 자영업을 하고 있다. 병덕씨는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고 자식들에게도 항상 그 점을 강조해 왔다”며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분히 일하지 못한 게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박승환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령에 분개해 자결했던 ‘참군인’ 박승환 육군참령의 생존한 직계 손자는 왕종(王鍾·64)씨. 박참령의 5남매중 장남 정흡씨의 차남이다. 장남 대종(大鍾)씨는 광복 직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나 96년 타계했다. 정흡씨는 조선은행 총재를 거치는 등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으나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총재직에서 쫓겨나는 등 일제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종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덕수상고를 졸업했지만 생활은 어려웠다. 형광등 공급업체를 경영했으나 부도로 실패한 뒤 83년부터 청계천4가에서 포장마차를 하다 지난해 그만 두고 4000만원짜리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 왕종씨는 자녀들에게 생활비 도움을 받고 있으나 자녀들도 부유하지 못해 어려운 형편이다.

▼안중근

안중근의사의 딸 현생씨와 차남 준생씨는 50년대에 사망했지만 모두 5명의 자녀를 남겼다. 장남 분도씨는 일찍 사망해 자녀가 없다. 준생씨의 자녀 3명은 모두 미국에 있다. 그중 교포사회에서 유명한 의사였던 장남 응호씨(67)는 정력적인 사회활동을 펼치다 최근 은퇴해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다. 응호씨는 안의사의 영정과 친필액자 등을 자신의 침실에 모셔놓고 늘 그의 유훈을 되새기고 있다. 응호씨는 “할아버지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날개’”라고 말한다. 백범 김구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선생과 결혼한 현생씨의 자녀 중에선 딸 황은주(黃恩珠·71)씨만 유일하게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거주지는 경기 용인시 수지읍.

▼유인석

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론을 주창하며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유인석선생의 유일한 손자 준상(濬相·77)씨는 온갖 인생유전을 겪었다. 준상씨는 한국전쟁 중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전쟁직후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그 뒤 스웨터 공장을 경영하거나 광부로 일했다. 89년경 지역유선방송사업에 뛰어들어 비로소 돈을 벌었으나 92년에 은퇴하고 조부와 부친의 공로를 인정해 정부에서 지급하는 매월 150만원의 연금과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다. 준상씨의 4남2녀는 모두 출가했다. 준상씨는 “부친과 조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에 한없는 자긍심을 느끼면서도 그분들처럼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어 늘 죄를 지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신채호

일제에 고개 숙이는 것조차 싫어 세수도 꼿꼿이 고개를 세운 채 했다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외아들 수범(秀凡)씨. 그는 91년 작고할 때까지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 속에 보냈다.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교육 기회를 놓친 채 부두노동자 고철장사 은행원 등으로 근무하면서도 단재의 저작과 논문을 정리하고 발간하는데 없는 재산마저 모두 쏟아부었다. 그는 평생 사글세방을 전전했다. ‘단재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몇년전 ‘마지막 고구려인 단재 신채호’를 써서 주목을 받았다. 이씨는 당시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집안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써 냈다.

〈김상훈·선대인·이완배기자〉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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