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추모식 세월따라 명암교차…문민정부 1만명참석 성황

  • 입력 1997년 10월 24일 20시 54분


고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역대 정권에서 어떤 평가와 대우를 받았을까. 전두환(全斗煥)정권 초기에는 추모식를 거행할 수도 없었다. 은밀한 전화연락을 통해 정해진 시간에 모인 몇 백명의 추모객이 묵념과 헌화로 간단한 참배를 드리는 게 전부였다. 이같은 추모식 「탄압」은 박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꾀하고 구 공화당세력의 재결집을 막고자 하는 전두환정권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는 게 추모식 관계자들의 설명. 84년 말 결성된 민족중흥동지회(현 민족중흥회)가 추모식을 주도적으로 준비하면서 85년 6주기부터는 구색을 갖춘 추모식이 열렸지만 정권의 방해는 계속됐다. 민족중흥회 강양식(姜亮式)사무국장은 『당시 이유없이 초청장이 배달되지 않았고 사무실에는 기관원이 늘 상주했다』며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87, 88년에는 추모식을 아예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집권한 뒤 기관원의 감시 등 추모식에 대한 방해는 사라졌으나 박대통령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은 91년 12주기 추모식에서 『각하가 가신 뒤 기대할 만큼 발전을 못 이루고 있고 60, 70년대의 활기와 진취적 기상은 사라졌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추모식 직후 현대그룹과 정부의 「세금 대결」이 본격화됐고 정명예회장은 사석에서 『추모사 5분 했다가 세금 5백억원을 두들겨 맞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는 참석인원이 1만명에 이르는 등 성대한 추모식이 열렸다. 94년 15주기 추모식에는 최규하(崔圭夏)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고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총재는 당시 추도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올해 18주기 추모식을 준비중인 민족중흥회 관계자들은 『26일 국립묘지에는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정에 시달려 박대통령을 그리워하는 국민이 어느 때보다 많이 찾아올 것이다』고 전망했다. 〈부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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