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왜 세종시 강변에 ‘계획도시’ 세웠나[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25일 23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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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리 유적의 항공 사진. 금강 변의 수백 동 건물지는 백제 중앙에서 파견돼 수취 관련 업무에 종사하던 관인들의 거주 공간과 수취한 곡물 등을 임시 저장한 창고로 추정된다.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제공
나성리 유적의 항공 사진. 금강 변의 수백 동 건물지는 백제 중앙에서 파견돼 수취 관련 업무에 종사하던 관인들의 거주 공간과 수취한 곡물 등을 임시 저장한 창고로 추정된다. 한국고고환경연구소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03년 이래 8년 동안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부지에 대한 유적 조사가 실시됐다. 그 과정에서 야외박물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금강 북안의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일대에서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백제 때 만든 건축물 흔적들이 빼곡히 드러났다.

반지하식 집터 몇 동이 군집을 이룬 통상의 소규모 마을과는 달리 수레가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 그 도로에 인접해 수백 동의 건물 터가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이 유적을 백제가 만든 ‘계획도시’로 해석하는데, 이 발굴을 통해 백제사의 어떤 비밀이 밝혀졌을까.

나성리 물류창고와 희귀한 얼음창고
이 유적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은 둘레에 큼지막한 도랑을 돌린 것인데, 그러한 건물이 40여 동이나 확인됐다. 그 밖에 창고일 가능성이 있는 지상식 건물 116동, 망루 6동, 다수의 구덩이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기획성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금강으로 이어진 간선도로를 따라가면서 창고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창고의 구조는 바닥에서 띄워 저장 공간을 마련한 고상식(高床式)이어서 곡물 등을 저장했을 가능성이 있고, 화물을 선착장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공간에 창고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금강 가까운 곳에서는 빙고(氷庫) 터 1기가 확인됐다. 빙고의 너비는 3.9m이고 깊이는 1.15m 규모로 아주 큰 편은 아니었는데, 길쭉한 배수로를 갖춘 구조였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공주, 부여 등 백제 왕도의 강변에서 여러 기의 빙고 터가 발굴되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장례에 얼음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왕도에서는 국가의 중요 행사 때 사용하기 위해 겨울철에 채빙하여 보관한 것 같다.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에서 출토된 수막새(와당·위쪽 사진)와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막새는 닮았다. 백제의 한성 궁궐 주요 건물에 사용된 기와가 지방에서 사용된 것은 특이한 사례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에서 출토된 수막새(와당·위쪽 사진)와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수막새는 닮았다. 백제의 한성 궁궐 주요 건물에 사용된 기와가 지방에서 사용된 것은 특이한 사례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그런데 왕도가 아닌 나성리 일원에 왜 빙고가 만들어진 걸까. 그것은 나성리에서 생활한 인물의 지위, 그들이 근무한 관아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은 나성리 출토 유물에서도 증명된다. 하나는 궁궐 내 주요 건물, 왕과 그 일족의 무덤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수막새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토제 장고 조각이다. 크기가 작아 목에 걸고 허리 부위에 위치시킨 채 두드린다는 점에서 요고(腰鼓)라고도 불리는 이 장고는 왕도에서 반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일 교류사 난제 푼 허리띠 장식
이 유적은 전체 규모에 비해 무덤 수가 적은 편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7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는데, 한곳에서 발견된 5기의 무덤은 크게 원을 그리듯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대체로 크기가 작고 망자의 시신을 목관에 넣어 안치하는 구조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4호묘도 길이가 3.5m에 불과하다. 이 무덤들은 나성리 유적에서 떨어져 분포하는 송원리와 장재리 고분군 등 현지 유력자들의 묘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어서 처음에는 조사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5기의 무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자리한 4호묘를 팠더니 내부에서 왕족이나 지방 유력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금동제 목걸이, 허리띠 장식, 화살통 부속구, 신발 등 고급 물품이 쏟아졌다. 게다가 목관 판재의 보존 상태가 마치 근래 만든 것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무덤 주인을 매장할 때 머리를 금강 방향인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출토품 가운데 금동제 허리띠 장식은 발굴 직후부터 현재까지 한일 양국 고고학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네모난 꾸미개에 새겨진 용무늬가 일본 ‘국가 중요문화재’인 나라시 니자와센즈카(新澤千塚) 126호분 출토 금제 방형판 속 용무늬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간 이 금제 방형판의 제작지가 중국인지, 한반도인지, 혹은 일본열도인지를 둘러싸고 다양한 주장이 있었지만, 나성리에서 허리띠 장식이 발굴되면서 백제산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나성리 허리띠 장식은 보존 상태가 나빴기에 현재 용무늬가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던져준다. 다만, 처음 발굴되었을 때 촬영한 X선 사진을 통해 유려한 용무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백제판 세종시’엔 누가 살았나
나성리 유적이 발굴된 후 학계에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 나성리 유적의 조성 주체가 백제 중앙일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또한 기왕에 존재했던 취락을 확대해 만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여 세운 일종의 ‘신도시’라는 점, 그리고 광주 동림동 유적처럼 수취한 물품을 모았다가 왕도로 옮기는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이론이 없다.

그와 달리 나성리 일대에 거주하던 유력자들이 모두 왕도 출신 귀족인지, 혹은 송원리나 장재리 등 지역 출신 유력자도 포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즉, 왕도 출신 귀족이라면 임기가 끝난 다음 한성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사후 서울 석촌동 고분군 등지에 묻혔을 것이다. 만약 지역 유력자가 포함되었다면 그들은 북으로 약 500m 떨어진 송원리 고분군이나 금강 남쪽의 장재리 고분군에 묻혔을 것이다. 이는 나성리에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지 않는 이유, 나성리 4호묘 주인공이 누구인지 등의 논점과 아울러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1600년 전 현재의 세종시 일대에는 ‘백제판’ 행정복합도시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계획도시가 세워졌다. 이 도시는 비록 백제가 고구려의 습격을 받아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기능이 급격히 축소되었지만, 백제가 영역을 확장하고 백제 문화의 꽃을 피우던 시기에 백제를 강고하게 떠받치던 튼튼한 버팀목으로 기능했다.

아마도 삼국시대 모든 나라는 나성리 유적과 유사한 거점 도시를 만들었을 것이지만, 발굴을 통해 전모가 드러난 사례는 매우 드물기에 나성리 유적은 장차 초현기 지방 도시 연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유적에 대한 더 정치한 연구를 통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한국 고대사의 세밀한 부분들이 차례로 밝혀지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백제#세종시#계획도시#나성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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