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손효림]고통에 대한 공감 이끌어내는 작가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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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무크, NYT에 지진 잔해 깔린 소녀 묘사
한강, 사회의 폭력 소설로 풀어 아픔 알려

손효림 문화부장
손효림 문화부장
‘슬픈 눈의 소녀는 10세 또는 12세가량임에 분명하다. … 가슴 아래가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움직일 수가 없다. … (휴대전화 카메라를 든) 남자가 “목마르니?”라고 묻는다. 소녀는 답한다. “추워요. 남동생도 여기 있어요.” … 고요하게 눈만 내릴 뿐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남자가 “도우러 다시 올게”라고 하자 소녀는 “가지 마세요!”라고 외친다. 소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처럼 점점 희미해진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71)가 뉴욕타임스(NYT)에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린 소녀.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11일(현지 시간) 기고한 글이다. 강진이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후 온라인에 올라온 영상을 본 파무크가 이를 묘사한 내용은 첫 줄부터 읽기가 힘들었다. 소설의 한 장면 같지만 엄연한 현실이기에. 그는 소녀가 구출되는 영상이 올라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폐허 속에서 막막해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알리고 무능한 정부를 질타하기에 앞서 파무크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그가 느낀 아픔을 전한다. 그러기에 이어지는 그의 비판과 요청이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파무크는 1999년 1만7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튀르키예 이즈미트 지진을 겪은 경험을 에세이 ‘다른 색들’(2016년)에 자세히 썼다. 당시 주저앉은 주택의 창문에 달린 망사 커튼이 미풍이 불 때마다 흩날려 집 안이 드러나는 광경을 보며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우며 사악함에 열려 있는지를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은, 그리고 세상은 얼마나 미약한가.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한강 작가(53)가 떠올랐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년), 제주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2021년)를 통해 역사가 개개인에게 가한 폭력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되지 않는 아스라한 분위기에서 제주4·3사건 당시 참상을 해독하기 어려운 제주어로 쓴 ‘작별하지 않는다’에 비해 ‘소년이 온다’에서는 구타당하고 고문 받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폭력적인 장면을 쓰는 데 애를 많이 먹는다는 그는 한 강연에서 말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년)에서 밝힌 내용이다. 한 작가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세상의 온갖 고통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글로 토해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으로 상징되는 육식을 거부하다가 끝내 나무가 되길 꿈꾸는 여성을 그린 ‘채식주의자’(2007년)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한 작가가 그만큼 고통에 민감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고통을 감지하는 데 특히 예민한 촉수를 지니고 이를 전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보다 깊이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생명들이 스러지고, 울부짖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보듬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먼저 필요한 건 고통에 공감하는 게 아닐까. 다행스러운 건 그것이 가능하게 자장처럼 우리를 당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글 그리고 문학, 나아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
#작가#고통#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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