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폭행과 手語 [횡설수설/이철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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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로 쳐주는 영화상인 아카데미 시상식은 대략 3시간 반가량 이어진다. 시상식 시청률은 비스포츠 생방송 중계 프로그램 중엔 가장 높다지만 최근 몇 년간 급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상식 시간을 줄이거나 주목도가 덜한 시상을 생중계 전에 배치하기도 했지만 하락 추세는 막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94번째 시상식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중계사인 ABC방송의 잠정치에 따르면 시상식을 지켜본 미국 시청자는 1536만 명. 최악이던 작년의 985만 명보다 56% 늘었다. 그 현장에서 벌어진 초유의 폭행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 윌 스미스가 자기 아내의 탈모 증상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코미디언 시상자에게 격분해 무대로 뛰어 올라가 뺨을 후려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가족의 아픔을 건드린 것에 자제력을 잃었다지만 폭력 행사는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스미스는 당국의 처벌과 남우주연상 박탈 위기에 처했다. 이번 사건을 두고 끝없이 추락하던 아카데미가 드디어 이제 갈 데까지 갔다는 혹독한 평가들이 줄을 잇는다. 한편으로 올해 시상식이 그 어떤 작품이나 배우, 감독이 아니라 ‘역대 가장 추악한 오스카의 순간’으로 기억될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아카데미상은 몇 년 전까지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비판받았다. 그런 따가운 시선에 아카데미도 변하기 시작했다. 재작년 한국 영화 ‘기생충’의 4관왕, 작년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도 그런 변화의 산물이었으리라. 아카데미는 올해 여성과 비백인, 성소수자, 장애인을 모두 무대에 불러올렸다. 특히 청각장애 부모를 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코다(CODA)’는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3관왕을 차지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TV플러스를 통해 출시된 작품이다. 감독상을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워 오브 도그’와 함께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세화, 할리우드가 지배하던 극장영화의 쇠락을 보여준다.

▷과거 할리우드는 장애인을 연기하는 비장애인에게 상을 줬지만 이번엔 달랐다. 청각장애인 트로이 코처의 남우조연상 수상은 그래서 빛났고, 그 시상자로 나선 윤여정의 수어(手語)는 더 큰 감동을 줬다. 윤여정은 수상자 호명에 앞서 수어로 “축하한다”고 표현했고, 관객들도 박수 대신 양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축하했다. 윤여정은 코처가 수어로 소감을 밝히는 동안 대신 트로피를 들고 곁을 지켰다. 누군가의 고통을 희화화한 코미디언, 분노에 찬 폭력을 행사한 할리우드 스타가 전 세계 시청자를 충격에 빠뜨렸다면 수렁에 빠진 아카데미를 살린 것은 윤여정의 진심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아카데미 시상식#폭행 사건#윌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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