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과오 용서 바란다”며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

동아일보 입력 2021-10-27 00:00수정 2021-10-2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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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2인자로 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 노 전 대통령은 12·12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대통령 재임 시절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으로 ‘사법적 단죄’를 받았다. 그는 집권기간 중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북방외교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평가는 이제 역사의 영역으로 남게 됐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의 핵심으로 권력 찬탈 대열에 앞장선 그는 5공 정권 내내 권력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회의에 참석하는 등 광주 시민 학살에 참여했다. 그런 점에서 1996년 대법원이 16년 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군사반란 및 내란죄로 준엄한 단죄를 내린 것은 늦었지만 사필귀정이었다.

최고 통치권자의 권력을 이용해 여러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걷고 부정축재를 일삼은 것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금융실명제로 비자금 은닉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다만 늦게나마 2629억 원의 추징금을 완납하고, 아들 재헌 씨를 여러 차례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로 보내 ‘대리 속죄’의 모습을 보인 것은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여전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전 전 대통령의 행보와는 차이가 있다는 평가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첫 직선제 대통령이자 ‘마지막 군인 대통령’이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건 1987년 ‘6·29선언’이었다. 그의 6·29선언을 놓고는 그 배경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폭압 정권에서 7년을 신음하다 민주화 열기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직선제 개헌 등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노 전 대통령의 결단이든 아니든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87년 체제’가 출범한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5·16군사정변 이후 이어져온 권위주의 체제가 문민정부로 넘어가는 정치적 과도기에 노태우 정권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사람 믿어주세요” “보통 사람의 시대”라는 구호를 내세워 당선됐다. 관권 선거 영향이 컸지만 민주화 열기에 맞춰 강압적인 군인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전략이 먹힌 측면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도 전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다. 여기에 김영삼-김대중의 분열까지 겹쳐 문민정부 수립은 비록 5년 뒤로 늦춰졌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이 군사독재 정권에서 문민정부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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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심혈을 기울인 건 북방외교였다. 헝가리를 필두로 동구권과 수교를 넓히기 시작했고, 소련과 중국과도 각각 수교를 맺는 성과도 이뤄냈다. 공산권과의 수교는 당시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발상의 전환이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개방과 동구권 몰락 등 국제 환경의 변화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나름대로 창의적 외교 전문가들을 발탁해 세계 질서 변화를 읽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산권과의 수교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경제 영토를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노태우 정권이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경부고속철도, 영종도 신공항 등 국가 기반시설 구축,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등 나름대로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는 실적도 있지만 정경유착이 심화하고, 수서·한보 비리 사태 등 대형 비리사건도 끊이질 않은 것은 지금까지도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 1987년만 해도 한국 경제는 두 자릿수 성장률과 낮은 소비자물가 상승률, 탄탄한 국제수지 흑자 기조로 사상 유례가 드문 호시절을 구가했다. 하지만 그의 집권 기간 중 노사분규가 크게 늘어나고 부동산가격을 포함한 물가가 급등했으며 국제수지조차도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노 전 대통령은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실시하고 전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는 등 5공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하기도 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 자신이 군사 쿠데타의 핵심이었다는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병으로 편안한 말년을 보내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그는 유언에서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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