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6·25고아 품은 폴란드 교사… 아프간 아이들 맞게 된 우리

신광영 사회부 차장 입력 2021-09-24 03:00수정 2021-09-2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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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축구화 언제 와요?”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은 요즘 틈만 나면 직원들에게 이걸 묻는다. 직원들이 얼마 전 아이들 발 사이즈를 재고 간 이후 난생처음 축구화를 신어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아프간에선 축구 할 엄두를 못 냈던 여자아이들도 20명 넘게 축구를 시작했다. 하루 1시간의 야외활동 시간에 운동장은 뛰노는 아이들로 분주해진다. 지난달 입국한 아프간 특별기여자 가족 390명 중 약 60%는 어린이 등 미성년자다.

우리에게도 전쟁을 피해 먼 나라로 떠났던 아이들이 있었다. 1953년 봄, 남북한 어린이 1200여 명을 태운 열차가 폴란드 시골의 프와코비체역에 들어섰다. 6·25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10만 명이 넘는 남북한 고아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동유럽 국가에 보육을 위탁했다.

아이들을 맞은 건 폴란드인 보육원 교사들이었다. 그들 눈에 비친 아이들은 전쟁의 충격과 부모를 잃은 상실감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은 음식이 있는데도 틈틈이 숲에서 고사리와 이끼를 캐 왔고, 침대와 이불이 있는데도 폭탄이 터질까 봐 침대 밑에 들어가 잤다. 교사들은 침대 밑에서 악몽을 꾸는 아이들을 달래며 침대에 눕히고 밤새 돌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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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마마(엄마), 파파(아빠)로 부르게 했다. 교사들은 이후 60여 년이 지나 80, 90대 노인이 되어서도 당시 아이들이 했던 한국말을 뚜렷이 기억했다. “빨리는 서두르는 거, 식사는 먹는 거. 아이들은 ‘식사, 빨리’ 이 말을 자주 했어요.” 한 백발의 여교사는 아이들이 고향을 생각하며 부르던 한국 동요를 그대로 기억해 불렀다.

교사들의 보살핌 속에 안정을 찾아가던 아이들은 폴란드에 온 지 6년 만인 1959년 모두 북송됐다. “엄마, 우리는 가요.” 이 말을 하며 아이들은 울었다. 아이들은 북한에 돌아간 뒤 보육원에 숱하게 편지를 보냈다. 원장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년)에는 아이가 그런 편지를 보내다가 북한 당국에 걸릴까 봐 답장을 끊어야 했던 보육원 원장이 나온다. 90대 중반의 그는 주름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아이 이름 세 글자를 말하며 “사무치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도 참혹한 역사를 겪었어요. 그것은 너무도 아픈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폴란드 교사들은 1939∼1945년 6년간 독일 나치군의 만행을 겪었다. 길가에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보며 자랐다. 부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보육원에서 자란 교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먼 나라 전쟁고아들의 상처를 끌어안으며 상처의 연대를 이뤄냈다.

13일 진천 인재개발원에서 아프간인들은 기자들과 만났다. “아프간에선 너무 위험하고 불안했어요.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온 저희에게 안전한 곳을 주고 사랑을 베풀어 줘 한국에 감사합니다.” 침략과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는 오랜 내전의 생존자들을 보듬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광화문에서#아프간 아이들#6·25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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