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헌재]사구(死球) 세계신기록, 최정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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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혜천(42)이라는 투수가 있었다. 왼손 투수인 그는 시속 150km의 빠른 공을 던졌다. 정작 상대 타자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건 종잡을 수 없는 제구였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은 타자 머리를 향하기 일쑤였다. 가끔은 등 뒤로 날아가기도 했다. 천하의 이승엽이나 이병규(이상 은퇴) 같은 타자도 이혜천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안타나 홈런을 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공에 맞지 않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몸에 맞는 공은 타자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공이다. 일단 무지막지하게 아프다. 공에 맞은 부분에는 야구공의 실밥 자국이 그대로 새겨진다.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몸에 맞는 공을 ‘Hit by pitched Ball’(HB)이라고 쓰는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구(死球)라고 한다. 예전엔 후자를 그대로 번역해 ‘데드 볼’이라 부르기도 했다.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고 레너드 코페트는 “무서움이야말로 야구라는 경기를 설명하는 첫 번째 화두가 돼야 한다. 타자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최선으로 공을 때리려는 욕망과 피하려는 본능의 억제 사이에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썼다.

지난주 한국 프로야구를 넘어 세계 야구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구’ 기록이 나왔다. SSG 중심 타자 최정(34)은 18일 NC와의 경기에서 6회 상대 선발 투수 루친스키가 던진 공에 맞았다. 몸쪽 깊이 들어온 공은 최정의 유니폼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올 시즌 16번째이자 개인 통산 288번째 몸에 맞는 공이었다. 이 사구로 최정은 사구 세계기록을 118년 만에 경신했다. 종전 기록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이자 감독으로 활약했던 휴이 제닝스의 287개(1891∼1903년)였다. 일본프로야구 최다 사구 기록은 기요하라 가즈히로(은퇴)의 196개다.

1루타를 쳐도 1루로 나가고, 사사구를 골라도 1루에 나간다. 최정은 사구로만 무려 288차례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출루로 팀에 적지 않게 기여한 셈.

더욱 중요한 것은 최정이 투수와의 ‘몸쪽’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투수는 타자의 두려움을 이용한다. 몸쪽 깊은 공 이후 바깥쪽 유인구는 효과 만점짜리 레퍼토리다. 많은 타자들이 알고도 당한다. 머리로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본능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가 두려움을 이겨내면 투수는 던질 곳이 없어진다. 최정이 대단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최정도 인간인 이상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나도 두렵다. 그렇다고 공을 두려워만 하다가는 좋지 않은 습관이 몸에 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타석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대한 뒤로 빠지지 않고, 타구를 센터 방향으로 보내는 것에만 집중한다.” 끝까지 보고, 마지막까지 공에 맞서면서 그는 KBO리그 최고의 오른손 타자가 됐다. 그가 때려낸 현역 최다인 390개의 홈런 뒤편에는 288개의 사구가 자리 잡고 있다. 세상엔 공짜가 없고, 아픈 만큼 달콤한 결실도 거두는 법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사구#세계신기록#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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