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진보 모독하는 저질 좌파… 어떻게 생겨나 어디로 가나

이기홍 대기자 입력 2021-08-06 03:00수정 2021-08-0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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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리 벽화’까지 치달은 저질 행태 비롯해
이념과 정치에 마취돼 저지르는 폭력들
진정한 자기희생 없이 민중·진보 내세워온
文정권 구성원들 속성과 국정 독주가 잉태
이기홍 대기자
지난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를 봤다. 1991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수도 모가디슈에 고립된 한국대사관 직원들이 필사의 탈출을 하는 스토리다. 영화에는 무장세력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힘자랑을 해대는 장면이 숱하게 등장했다.

광기와 폭력성의 극치를 보다 보니 크메르루주, 중국 홍위병, 6·25전쟁 당시 완장들의 행태가 연상됐다. 이념의 이름으로 야만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현대사에서 낯선 장면이 아니다.

극장을 나와 뉴스를 검색하니 ‘쥴리 벽화’ 소식이 줄을 이었다. 쥴리 벽화도 적(敵)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야만성의 산물이다.

과거엔 좌든 우든 금도는 있었다. 과거 선거 때도 후보 배우자를 놓고 누구와 동거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돌았지만, 그건 하수도에 해당되는 ‘찌라시’의 세계에 국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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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요즘 일부 세력에겐 금도가 없다. 그 결과 하수도가 상수도로 역류해 범람한다. 가짜뉴스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부터 천착해야 하는데,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는 여당은 유튜브와 1인 미디어는 적용 대상에서 슬그머니 빼버렸다.

한국의 권력 주변 좌파집단은 어쩌다 이렇게 저질로 전락한 것일까.

첫째, 친문세력 내 운동권 출신들은 진정한 진보 가치의 맥을 이어온 주역이라 보기 어렵다. 80년대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독재정권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는 따듯한 마음의 청년들이었다. 그중에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무명으로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말기 학생운동의 실질적 지휘부는 구국학생연맹 같은 지하조직이었다. 구학련 총책이었던 서울대생 김영환은 수년 후인 90년대 초 북한 잠수정을 타고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난 뒤 주체사상의 몽상에서 깨어나며 북한인권 운동가로 거듭 태어났다.

반면 현재 학생운동권 출신의 대표처럼 인식된 정치인 중 상당수는 총학생회 같은 공개조직에서 활동하다 투옥 생활을 겪은 뒤 상당수는 군 면제를 받고 현실 정치인의 휘하로 들어갔다.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이는 송영길 대표 등 소수에 불과하다. 조국 교수에 대해선 김영환은 “운동권 축에도 못 낀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아랫세대인 40대 좌파 인사들은 반독재투쟁이나 노동현장은 거치지 않은 세대다. 그들에게 진보 활동은 자기희생이나 헌신과 직결된 게 아니다. 기득권을 내놓는 손해를 볼 필요도 없이, 일상에선 기득권층으로서의 특혜는 다 누리면서 공개적으로는 약자의 대변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꿩 먹고 알 먹기다.

이런 이들의 상당수는 신독(愼獨), 가난한 이웃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오는 검소함과 절제 등 과거 진정한 진보인사들이 실천했던 생활 특성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암울했던 시절 기득권을 버린 채 헌신했고, 그 대가로 어떤 권력이나 명예, 보상도 바라지 않았던 사람들의 열정과 겸손을 알기나 할까.

저들이 저열해진 두 번째 원인은 문 정권의 행태다.

반대론을 설득하고 내용을 보완하는 과정 없이 독주하다 보니 반대론자들이 승복하지 못하는 대립 구조가 고착됐다. ‘의로운 목적’을 위해선 절차와 수단의 정당성은 양보할 수 있다‘는 운동권적 사고(思考)의 발현이다.

그 결과 정권을 증오하며 정권교체가 필생의 소원인 국민이 늘어나고, 여기에 맞서 정권 지지자들은 부족전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원시인들처럼 그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는 악순환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을 진보는커녕 좌파라 부르는 것도 적절치 않다. 좌든 우든 가치관을 지향한다면 제도와 질서의 불합리한 것들을 유불리와 상관없이 고쳐야 하는데 정반대다.

단적인 예로 나팔수 방송, 검찰권 남용, 코드 낙하산 인사 같은 구시대의 폐습들은 이 정부 들어 더 적극 활용됐다. 그러다 나중에 그 칼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 같으면 뒤늦게 개혁을 부르짖는데 대표적인 예가 검찰개혁이다.

이들의 머릿속엔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돈과 선전선동술을 잘만 활용하면 권력을 영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각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그 환각이 온갖 무리수로 발현되고 있으며 강도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민도가 낮은 제3세계와 달리 시민층이 두텁게 발달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궤도를 이탈한 권력은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차벨스(괴벨스+차베스)‘의 할아버지가 나선다 해도 성숙한 민의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평화적·단계적 진화‘가 당분간 어려울 것 같다는 점이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단절 없이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진화론의 새로운 이론인 단속평형이론(斷續平衡理論·Punctuated Equilibrium)처럼 각 단계마다 마침표를 찍듯이, 정권마다 격렬한 단절과 부정(否定)이 이뤄지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결과 광신적 지지·반대 집단이 더 양산되고, 심리적 내전이 지속될 것 같아 안타깝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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