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 ‘슬의생’이 그리는 판타지, 현실에서도 가능하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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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 뉴스1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 뉴스1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이하 슬의생)에서 양석형 산부인과 교수(김대명)가 시험관 시술 세 번 만에 얻은 아이를 유산한 산모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다. ‘눈치 없는 곰탱이’로 불릴 정도로 감정 표현에 서툰 그가 환자와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깨고 건넨 위로였다. 산과 교과서 첫 장의 첫 문장이라고 한다.

지난달 17일 첫 방송부터 시청률 10%를 넘기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슬의생’은 진한 위안을 준다. 온 가족이 모여 ‘본방 사수’를 한다는 집도 많다. 슬의생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배려는 친절을 넘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기에 감동을 준다.

시청자 댓글에는 ‘현실에는 이런 의사들 없음’이라는 글이 적지 않다. ‘슬의생은 판타지’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드물다. ‘드라마니까’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실제 삶에서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친절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할까.

일단 개인의 인성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겠지만 전적으로 이에 기댈 수만은 없다. 필요한 건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만드는 사회 구조다. 전날 당직을 하고 다음 날 저녁까지 외래 진료를 하면서도 마지막 환자의 불안까지 잠재워주는 이익준 간담췌외과 교수(조정석)의 강철 체력과 정신력을 모든 의사가 지닐 수는 없다.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아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연우 엄마’라고 부르는 유일한 존재인 의료진을 만나러 수시로 병원을 찾는 이와 커피를 마시며 “연우 생각이 나면 언제든 오시라”고 말하는 외과 레지던트 장겨울(신현빈). 잠잘 시간도 부족한 레지던트 중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자는 한 대학병원에서 오후 늦게 마지막 외래 환자로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한눈에 봐도 피로에 찌든 의사의 목소리는 힘겨웠다. 차트에 기록하던 그는 양손을 계속 주무르더니 결국 양해를 구했다. “오늘 너무 많은 환자를 진료해 손이 저리고 떨린다”고. 기자는 처방전을 받아가란 말을 듣고 진료실을 나왔다. 증상에 대해 자세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김범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에세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휴가를 간다고 했다가 환자 보호자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경험을 썼다. 아픈 환자를 두고 어떻게 휴가를 가느냐고. 5년간 가족과 제대로 시간을 못 보낸 그는 속상한 마음으로 휴가를 갔지만 푹 쉬고 나니 치료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고 환자와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고 한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친절은 편안한 몸과 마음에서 나온다. 이는 사회 모든 조직과 구성원에게 해당된다.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쫓기듯 일하는 이에게 배려를 기대할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서로를 보듬는 여유라는 완충 장치를 지니게 하는가. 슬의생을 보며 떠올린 질문이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슬의생#판타지#현실 가능성#개인의 인성#사회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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