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채찍 꺼내든 노예주 “생각할 시간도 못 줘”

주성하 기자 입력 2021-04-15 03:00수정 2021-04-1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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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평양시 1만 세대 살림집 건설 착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이 건설자를 대표하는 군 장성에게 붉은 깃발을 건네주고 있다. 사진 출처 조선중앙통신
주성하 기자
지금 평양에는 대규모 공사판이 펼쳐졌다. 지난달 김정은의 지시로 매년 1만 세대씩 5년 동안 5만 세대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시대 평양에 건설된 미래과학자거리는 2500여 세대, 여명거리는 4800여 세대이다. 그러니 5년 동안 매년 미래과학자거리 규모의 4배, 여명거리 규모의 2배를 건설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이미 1만6000여 세대가 추가 건설되고 있다.

강력한 대북 제재로 돈줄이 막히고, 셀프 방역으로 1년째 국경까지 틀어막았는데 과연 5년 안에 6만6000여 세대를 건설할 수 있을까. 김정은도 지난달 착공식에서 “도전과 장애가 그 어느 때보다 혹심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건설을 하는 것 자체가 상상 밖의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혹심(酷甚)하면 하지 말아야지 왜 하는 걸까.

이를 두고 평양의 주택난이 심각하다는 분석도 있고, 평양의 민심을 얻으려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평양 사람들은 5년 내내 동원을 다녀야 하고, 건설 지원으로 계속 돈을 뜯길 건설은 절대 환영하지 않는다.

김정은이 대규모 건설을 시작한 진짜 속내는 역설적이게도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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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북한이 무역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모두 평양으로 모였다. 무역이 차단되니 평양 사람들의 주머니가 비어 간다. 국경을 폐쇄하니 물가도 급속히 상승한다. 더욱 큰 문제는 무역일꾼부터 시작해 의류 임가공 공장 노동자들까지 평양의 무역 관련 종사자 수십만 명이 무직자가 됐다. 외화를 좀 만지던 중산층이 벌써 1년 넘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됐고, 점점 버틸 능력이 소진되고 있다. 그러면 김정은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한 통치자들은 지방 민심은 크게 개의치 않아도 평양 민심에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대규모 건설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꺼내 든 카드다. 거대한 목표를 만들어 채찍질하며 내몰아야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에게 모여서 살기 어렵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시간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생각할 시간도 주지 말아야 한다.

대규모 건설이 시작되면 평양의 이슈가 거기에 매몰된다. 수십만 명이 매일 일찍 도시락을 싸들고 도시 외곽의 건설장에 동원된다. 집에 돌아오면 육체가 고달파 딴생각할 힘도 사라진다. 동원되지 않는 사람들도 매일 지원 물자를 내라는 닦달질과 함께 괴롭힘을 당한다. 기관별로 과제를 설정하고 칭찬과 처벌을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엔 처벌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게 된다. 아파트가 올라가면 시선은 거기에 꽂히고 층수에 신경을 쓰게 된다.

‘아리랑’과 같은 대집단체조도 알고 보면 같은 이유로 한다. 돈도 안 되는 집단체조를 위해 왜 매년 10만 명의 청소년들이 1년 가까이 엄격한 규율 속에 혹사를 당하는지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다. 몸이 고달프면 머리가 단순해져 딴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장 반항적이고 사고도 많이 치는 청년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어려서부터 명령에 복종하게 세뇌까지 시킬 수 있다.

올해는 경제난으로 청년뿐만 아니라 온 평양 시민들이 아우성이다. 그러니 모든 연령을 아우르는 동원이 필요하다. 평양 시민 전체를 내몰 일은 대규모 건설밖에 없다.

이 수법은 김정일에게서 배운 것이다. 김정일은 2008년 후계 세습에 착수하는 동시에 “평양에 2012년까지 10만 세대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총동원령이 떨어졌다. 시민은 물론 평양 22개 대학 전체가 문을 닫았다. 대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1년 9개월 동안 공사판에 동원됐다. “새파란 아들이 또 세습하냐”는 불만을 말할 힘도 없었다. 10만 세대 건설을 내걸고 1만 세대도 완공하지 못했지만, 시민들이 건설 중단 명령이 떨어져 ‘해방의 만세’를 부를 때에는 이미 3대 세습도 마무리됐다.

이번도 같은 수법이다. 계속 하면 약발이 떨어지니 건설은 최후의 수단으로 꺼내 드는 비장의 카드다. 매년 1만 세대를 짓지 못해도 김정은은 상관없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여야 사람들이 마지막 기운까지 짜내게 되고, 체제에 반항할 에너지를 딴 데 쏟는 것이다. 달성하기 어려워야 김정은이 숙청을 통해 공포 분위기도 만들 수 있다. 노예는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말고 채찍질을 하며 내몰아야 반항하지 않는다는 독재자의 통치 방식도 3대째 세습된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채찍#대규모 공사판#북한#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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