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만큼만 삽시다[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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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단국대 교수
서민 단국대 교수
“기생충은 숙주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숙주가 생명이 끊기는 순간 기생충 또한 생명이 끊긴다. 그런데 고종은 기생충의 기본 생존 원칙을 무시했다.”―박종인 ‘매국노 고종’ 중

‘매국노 고종’은 그 제목처럼 고종이 무능한 왕이라고 역설한다. 대원군은 재정 확충, 군대 정비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권을 장악한 고종이 원점으로 돌려놓는 바람에 조선의 회생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나라가 가난하니 어쩌겠냐?’고 푸념하면서 가난 탈출 대신 탐욕만 추구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고종을 ‘욕심에 굶주린 기생생물’에 비유한다.

10년 전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고종이 무능하다 해도 한 나라의 왕에게 기생충보다 못하다고 한다면 반발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딴판이다. 기생충 실물을 전시한 ‘기생충박물관’이 만들어지고, 우리나라 제일가는 영화감독은 영화 제목을 ‘기생충’이라 짓는다. 지난 세월 책과 강연을 통해 기생충이 착하다고 떠든 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니, 어찌 뿌듯하지 않겠는가.

첫 책 ‘기생충열전’을 쓸 때 방향을 두고 고민했다. ‘기생충의 엽기성을 부각시킬까? 신비한 동물이라고 우겨보는 건 어때?’ 그러다 기생충학을 배우면서 의아하던 게 기억났다. 맨 처음 배운 회충은 감염되어도 별 증상이 없단다. 편충, 십이지장충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기생충들은 왜 하나같이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기생충은 사람 몸에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 종족을 번식시키는 게 삶의 목표. 이를 위해서는 숙주인 사람이 기생충의 존재를 알아채서도 안 되고, 기생충보다 먼저 죽어도 안 되는 것이다. 길이 5m 넘는 광절열두조충이 몸에 있어도 사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기적은 이래서 가능했다. 기생충을 폄하하고 욕으로 쓰는 분들에게 한마디 드린다. 더도 덜도 말고, 기생충만큼만 하자. 그 정도면 어디 가서 욕은 안 먹을 테니까.

서민 단국대 교수


#기생충#숙주#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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