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 나오세요”[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5〉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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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선박에 승선하면서 외부와의 통신수단이 궁금했다. 첫 승선 당시 통신국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통신장은 모스부호를 이용하여 전보로 회사에 보고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선박에도 통화 수단이 보급됐는데 인공위성을 이용한 전화 방식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화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너무 비싸 개인용으로는 사용 불가였다. VHF(초단파 이용 송수신장치)라는 손쉬운 통신수단이 있었다. 가청거리가 60마일 정도인 게 단점이었다. 모든 선박은 항해 중 공용으로 16번 채널을 듣도록 되어 있다. 선박은 조난 시 이 채널을 통해 긴급구조를 요청한다.

때로는 VHF가 선원들의 개인 용무에 사용되기도 했다. 고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VHF를 통해 전달됐다. 망망대해를 항해 중 VHF는 우리 동포들을 만나는 수단이었다. “한국 사람 있으면 나오세요” 하고 수화기에 대고 말을 한다. 대개는 아무 대답도 없다. 그 망망대해에 선박이 없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일주일 정도 부르면 한 번은 우리 동포들이 나타난다. “여기는 한국 선박, 오버”라고 답이 오면 너무 반갑다. 아프리카 연안을 지날 때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의 선장과 통화를 한 기억이 새롭다. 출국한 지 2년이 되었다고 했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 애환을 나누었다.

한번은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첫 승선 중이던 동기생 3등 항해사들이 VHF를 통해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서 만났다. 졸업 후 1년 만에 바다에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마침 안개가 자욱이 끼어 앞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항해 중이었다.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충돌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망각한 채 이들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꽈당!’ 하며 충돌이 발생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사고는 선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게 했다.

VHF는 상대방을 특정할 수 없는 맹점이 있었다. 앞에 충돌 위험이 있는 선박이 접근하고 있다. 상호 항해 방법을 약속했다. 그런데 나는 약속대로 항해했는데 상대방이 따르지 않아서 충돌사고가 발생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사고가 났다”고 하면 “나는 당신과 약속한 바가 없는데 무슨 이야기냐”고 오히려 상대방이 화를 낸다. 알고 보니 나는 전혀 다른 제3의 선박과 통화를 했던 것이 아닌가! “여기는 ×××호입니다. 나의 선박에서 6마일에 180도 방향에 있는 선박 나오세요.” 이런 식으로 상대 선박을 불러 통화를 한다. 이후 AIS(자동선박식별장치)가 사용되면서 상대방의 선명을 특정해 충돌사고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승선 중 가장 신나는 일은 고국 부산항 앞을 지날 때이다. 대한해협을 지날 때 선장은 가능하면 부산항으로 바짝 배를 붙이라고 명한다. VHF 통화가 더 깨끗하게 되도록 선원들을 배려하는 조치다. “곧 부산항 앞을 지나니 집에 통화하고 싶은 사람은 통신실에 오십시오.” 선원들은 우르르 모여들어 VHF로 집에 전화를 걸어 부인, 아이들과 통화를 한다. 이렇게 가족의 목소리라도 들어보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송출선이라서 1년이 되어야 귀국하는 선원들에게는 이보다 큰 선물은 없었다. 고마운 VHF!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선박#한국 사람#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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