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에도 트럼프는 어렵다고들 했다[오늘과 내일/이승헌]

이승헌 정치부장 입력 2020-06-16 03:00수정 2020-06-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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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가려졌던 ‘샤이 트럼프’
섣불리 예단 말고 전략적으로 관망해야
이승헌 정치부장
“이제 트럼프는 끝났네….”

미국 대선을 한 달 앞둔 2016년 10월 7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바 ‘음담패설’ 동영상이 폭로되자 워싱턴 주변에선 이런 말이 쉽게 들렸다. 뉴욕타임스 등 진보 언론은 일찌감치 축배를 들었다. 미 정가에 안테나를 대고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에서도 “트럼프는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한국 정치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당시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필자의 생각은 좀 달랐다. 뭐 대단한 정치적 인사이트가 있어서가 아니라, 백인들을 만나 보면 주류 언론과는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 동영상의 핵심 논쟁거리는 여성 성기를 뜻하는 p가 들어간 트럼프의 막말이었다. f로 시작하는 다른 상스러운 표현도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공식석상에선 고급 영어를 쓰는 중산층 이상 백인들도 사석에선 내뱉는 표현이다. 옆집에 살던 백인 아저씨의 말. “동영상이 몰카였는데 그런 표현이 국정 수행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나도 쓰는 말인데 그럼 나도 나쁜 놈인가?”


한 달 후 대선 결과에 대해 미 주류 사회는 트럼프의 충격적인 역전승이었다고 했다. 음담패설 동영상이라는 ‘악재’를 뚫었으니 역전승이라는 건데, 실제로는 원래 이기던 승부에 별 영향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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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왜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패배를 예상했을까.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흔히 PC라 불리는 가림막 때문에 정확한 흐름을 읽는 게 어려웠다고 본다.

PC는 미국의 가치를 지키는 언행을 하라는 것이다. 특정 종교를 비하하지 않고, 인종차별에 분노하라는 것들이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미국인들에겐 은근히 ‘PC 피로감’ 같은 게 있다. 버락 오바마라는 첫 흑인 대통령 치하 8년은 PC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시기. 워싱턴의 한 외교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바마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흑인 여성인 수전 라이스를 4년간 중용하자 워싱턴에 ‘흑인 대통령에 흑인 여성 외교 컨트롤타워?’ 하며 갸우뚱한 사람이 많았다.” 트럼프의 위험천만한 언행에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비판했지만, 이게 고스란히 반(反)트럼프 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착한 미국인 코스프레’에 질린 사람들 중 일부가 “기성 정치권은 PC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트럼프에게 동조했던 것이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두고 다시 무대에 선 트럼프에 대해 “이번에는 정말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 흑인 사망 시위까지 겹쳐 현직 프리미엄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과연 4년 전보다 상황이 안 좋을까. 진보진영은 그때나 지금이나 트럼프를 혐오한다. 흑인들은 원래부터 트럼프 편이 아니다. 속으로 트럼프에게 동조하고 그 덕에 돈을 버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경쟁 후보는 과연 4년 전 힐러리 클린턴보다 매력적인가. 3수 끝에 대선 무대에 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는 당선돼 내년에 취임하면 79세로 트럼프보다도 네 살 더 많다.

정치권에서, 특히 여권에서 4년 전처럼 은근히 트럼프 낙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2017년 북-미 갈등이 첨예할 때 여권 핵심 인사들이 대놓고 트럼프 욕을 하는 걸 자주 접한 적이 있다. 막판에 온갖 네거티브가 난무하는 미국 대선의 정치적 역동성은 우리 대선을 능가하는 편이다. 11월 대선 전까지 철저하게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게 슬기로운 스탠스가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미국 대선#샤이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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