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직업 없이도 나를 소개할 뭔가를 위해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우리는 살면서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몸치였던 내가 서른 살 겨울, 댄스 학원에 등록한 것도 우연한 사건들에서 비롯됐다.

첫 번째는 문학의 밤 행사였다. 올해의 시인을 뽑는 자리였다. 주인공은 1992년생 시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피자를 좋아하고, 춤을 추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진짜 피자를 돌렸다. 촬영하러 갔던 나는 문인들 사이에서 혼자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춤추는 시인이라니, 독보적 마케팅이야. 그런데 직업 아닌 걸로 나를 설명하는 건 반칙 아닌가?’ 물론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내 삶에서 직업을 빼도 나를 소개할 뭔가가 있으려나’하고 자문해 봤다.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문보영 시인의 팬이 되었지만 춤은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춤을 못 추니까! 잘하는 것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못 하는 걸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내 안의 완벽주의, 창피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그런 걸 해도 멋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검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일함에 수필 하나가 배달됐다. 당시 나는 ‘일간 이슬아’라는 지금은 독립출판계의 스타가 된 작가의 글을 돈 내고 구독하고 있었다. 제목은 ‘잘 못하는데도 계속하는 일들’이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대부분 내가 조금 잘하는 일이었다. 잘할 걸 알고 못하기 싫기 때문에 기대와 희망과 부담을 놓기 어려웠다. 하지만 뉴잭스윙 학원에서 나보다 못 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슬아 작가도 춤 학원을 다니다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못해도 즐길 수 있을까? 연습실 전면 거울에 엉망진창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딱히 못 봐 줄 이유도 없었다. ‘그래, 잘하는 걸 더 잘하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의미 있을 거야. 죽기 전엔 꼭 한번 춤을 배워 보자.’ 하지만 ‘죽기 전에’가 ‘당장 오늘’로 바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분, 다음 무대 누군지 아시죠? 재범이 형의 찌찌파티 함께해요!’ 음악 페스티벌의 특성상 무대가 끝나면 다른 스테이지로 이동하는데 래퍼 로꼬가 날 붙잡았다. ‘찌찌파티라니, 궁금하잖아.’ 기다려보기로 했다. 곧바로 힙합 뮤지션 박재범이 등장했다. 상의 탈의 퍼포먼스로 이두박근을 전면에 내세운 채.

나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무대 앞쪽으로 걸어갔다. 체조경기장 꼭대기까지 울려 퍼지는 바이브의 근원은 댄서들이었다. 저렇게 웃통을 벗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한 번도 욕망해 보지 못한 꿈이었다.

다음 날 동네 댄스 학원에 등록했다. ‘제일 초보자반으로 등록해 주세요.’ 선생님은 ‘비기너, 코레오’ 반을 추천했다. 요즘은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가 대세라고 했다. 안무가가 특정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스타일로 안무를 만드는 것을 뜻했다. 코레오는 춤을 의미했고 그래피는 글쓰기를 뜻했다. 춤으로 하는 글쓰기. 지금은 받아쓰기도 벅차지만 언젠가 자유롭게 글을 쓰는 날이 올까.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댄스#코레오그래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