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노지현]여성 정치인은 여성일까, 정치인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노지현 사회부 기자
노지현 사회부 기자
6·13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지역 구청장 후보로 나선 여성 정치인 A 씨는 과거 지역 행사에 같은 당 소속 남성 구청장과 함께 참석하는 일이 잦았다. A 씨는 이 구에서 구의원 두 번, 시의원 두 번을 지낸 터줏대감이었다. 그런데도 행사장에서 “구청장님 부인 아니세요?” “두 분이 부부 아니었어요?”라고 묻는 주민이 적지 않았다. 남성과 남성이 같이 있으면 ‘정치인이 두 명 왔나 보네’라고 생각하지만 여성이 남성과 서 있으면 ‘부인인가’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지방선거 후보자 포스터를 보면서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 눈에 띄었다. 여성 후보가 확실히 많아졌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로 여성 대 여성이 맞붙은 지역도 있다. 어떤 여성 서울시장 후보는 포스터에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라고 크게 썼다. ‘남성 우위 현실에 저항하며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인가’라며 내심 불편해하는 남성 유권자가 적지 않다. 정치적으로 큰 꿈을 꾸는 여성 정치인은 공개석상에서 페미니스트의 ‘ㅍ’도 꺼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1세대 여성 정치인들은 이 같은 성차별적 시선 때문에 고충이 많았다고 토로한다. 당내 경선에서 자신과 맞붙은 남성 후보들은 “여자가 당의 후보가 되면 지도자로서 약해 보여 본선에서 떨어진다”고 은근히 또는 대놓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너무 못생겨도 안 된다. 너무 예뻐서도 안 된다. 외모가 빛나면 ‘피부과에서 돈깨나 쓰나 보다’라는 핀잔을 듣는다.

미혼인 여성 정당인 B 씨는 “정책을 논하기보다 ‘50세나 됐는데 왜 아직까지 결혼 안 했대?’ ‘남편은 누구래? 뭐하는 사람이래?’라는 가십성 질문을 많이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가정주부나 어머니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도 리스크가 크다. ‘집안일이라면 모르겠지만 굵직한 지역 정책은 해내지 못할 사람’이라며 공격받기 딱 좋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닌 듯하다. 외국 여성 정치인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 과정 내내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지적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백악관 선임고문 켈리앤 콘웨이도 ‘술이 덜 깬 것 같은 얼굴에, 밤새워 놀다 못 지운 듯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는 비난에 시달린다. 뉴욕타임스는 ‘진영과 상관없이 성차별(sexism)이 여전히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지역 또 다른 구청장 후보로 나선 여성 정치인 C 씨는 구청장 시절 명함에 ‘엄마행정’이라는 문구와 앞치마를 두른 자기 캐리커처를 새겼다. C 씨는 “엄마가 꼭 생물학적 성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엄마!’를 외치지 않느냐”며 “문제를 세심하게 해결한다는 이미지로 쓴다”고 말했다.

4연임에 성공한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여성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마 없을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성’에 구애받지 않는, 눈 밝은 유권자가 많으리라 믿는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
#여성#정치인#성차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