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정훈]중매쟁이의 신뢰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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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북-미 간 중매외교가 힘든 건 1차적으로 까칠한 미국 탓이다. “집안 재산은 100억 원 이상이어야 하고 외모는 김태희급이어야 한다”니 선을 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김태희급이 나오지 않으면 면전에서 “넌 참 별로야”라고 면박을 주겠다고도 한다. 섭외가 쉽지 않은 김태희급을 맞선자리로 끌어내야 하는 우리로선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당초 우리 정부의 중매전략은 3단계였다. 외교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인도적 대화→포괄적 핵 대화→비핵화 대화’의 순으로 끌고 가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억류자 석방을 위해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최대의 압박’ 기조를 깨야 하는 모순에 부딪힐 수 있다”고 말했다. 핵 문제까지로 넘어가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곧 혼기를 놓친다’며 경고해온 미국에 북한이 뜻밖의 성의를 보였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별사절단에 “비핵화 문제 및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북한을 상대로 한 1차 중매 작업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워싱턴 조야에선 정권 교체에 대한 두려움이 김정은의 태도를 바꿔놨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정권 교체 의도는 없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말이 쏙 들어갔다. “정권 교체가 북핵 해법”이라고 해온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대한 신임은 더 두터워지고 있다. 트럼프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말려서 자멸하게 하든(제재와 압박), 때려서 소멸하게 하든(군사공격), 둘 중의 하나는 해야 결론이 난다고 보는 분위기가 강했다.

2002년 새 국가안보전략(NSS)을 발표한 뒤 이듬해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는 얘기도 끊이지 않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①대량살상 무기 개발 ② 9·11테러 지원 ③인권 탄압 ④유엔 결의 위반 등을 공격 명분으로 삼았다. 최근 북한과 관련해 듣는 말들과 겹쳐진다. 결국 이런 강경 기류가 역설적으로 트럼프가 원하는 대화판을 짜는 데 힘이 됐지만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여전히 강한 의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다시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불신이다. 트럼프는 “조지 부시 부자도 속고,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도 속았지만 나는 못 속인다”고 말해왔다.

실제 북한 노동신문은 6일 “핵무력은 미국의 범죄를 끝낼 정의의 보검”이라고 보도했다. 비핵화 대화 의지를 밝힌 건 이런 보검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뜻이어서 모순을 야기한다. 김정은으로서는 임기가 정해진 트럼프 말만 믿고 핵을 포기했다가, 후임자에게 뒤통수 맞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트럼프 입장에선 ‘북한이 비핵화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비핵화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볼지 모른다. 그러면서 실제 비핵화가 될 때까지 현재의 압박을 풀지 않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매쟁이의 2차 역할이 필요해진다. 문 대통령은 4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김정은과 만났을 때 구체적인 비핵화 로드맵을 받아내야 한다. 이걸 토대로 타임테이블을 만들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야 한다.

중매쟁이의 역할은 결혼을 성사시키는 일이다. 트럼프는 이 중매가 잘되면 좋고, 잘못돼도 다른 옵션에 대한 명분이 생긴다. 혹시라도 김정은의 웃는 얼굴이 역시 가면이었다면 중매쟁이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 어려운 중매가 북-미 대화와 한반도 비핵화의 혼사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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