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공무원 카톡 유랑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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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상훈 경제부 차장
5년 전인 2012년 12월 20일, 기획재정부가 정부세종청사에 간판을 달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당시 기재부 2차관), 최종구 금융위원장(〃 국제경제관리관)이 고위 간부로 현판식에 참석했다. 장관은 “대한민국 경제 심장, 세종에서도 멈추지 않겠다”고 축사를 했다. 모두가 박수를 쳤지만 누구도 환하게 웃지 않았다.

개청 일주일 뒤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4도였다. 눈도 많이 왔다. 심장이 멈추지 않으려면 뭐라도 먹어야 했다. 그해 연말 식사를 하기 위해 2시간 넘게 줄을 서는 ‘구내식당 대란’이 벌어졌다. 직원들은 눈밭을 헤치고 아파트 공사장 함바 식당을 전전하며 끼니를 해결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났지만 좀처럼 봄은 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주말 부부로 지내던 한 젊은 사무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 잘한다고 소문난 관료들은 앞다퉈 사표를 썼다. 이따금 언론에 세종시의 문제점이 다뤄졌지만 기사마다 “철밥통이 배부른 소리 한다”는 비난 댓글이 달렸다.

세종청사 이전이 마무리된 2014년 말 영화 ‘인터스텔라’가 개봉했다. 1031만 관객이 몰려들며 흥행에 성공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대사가 히트를 쳤다. 세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회 업무는 어떻게 대응하나요?” “민원인은 어떻게 맞이하나요?” “전문가와 소통은 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공무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겁니다. 늘 그래 왔으니까요.”

실제로 그들은 답을 찾았다. 이제 세종에서 밥걱정을 하는 공무원은 없다. 식사 후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까지 생겼다. 올해만 세종에서 아파트 1만5000채가 입주민을 맞이하며 주거 문제도 해결했다. 멀티플렉스 극장, 찜질방은 성업 중이다. 전국 1위인 세종시 합계출산율(1.82명)은 이곳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됐다는 걸 웅변한다.

정작 가장 중요한 해답은 찾지 못하고 있다. 일하는 방식의 문제다. 서울∼세종을 오가느라 생기는 업무 공백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고작 찾은 답이 카카오톡이다. 실장은 서울청사에서, 국장은 커피숍에서, 과장은 KTX에서, 사무관은 세종청사에서 각자 카톡을 켜고 회의를 한다. 각종 기밀문서와 보안자료가 카톡방을 떠다닌다. 모두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지만 카톡 말고는 답이 없다. 한 기관장은 구글 g메일(gmail.com) 주소가 적힌 명함을 외국 사절단에 건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늘 KTX와 이동하는 차에 있으니 태블릿PC로 열기 편한 주소를 쓸 수밖에 없어서 생긴 일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가상통화 자료 유출은 단순한 보안 문제가 아니다. 짧게는 세종청사 이전 후 5년간, 길게는 서울 밖으로 정부청사를 돌리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부터 30년 넘게 쌓인 업무 비효율의 상징이다. 정치적 이유로 이리저리 정부 부처를 흩어놓고 그로 인한 업무 차질은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방치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무원 카톡 유랑단’이 생겨났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그럴듯한 워크숍 하나 열어서 “되도록 서울에 오지 말라” “주말엔 카톡 하지 말라”고 지시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중앙정부가 서울-과천-세종-대전으로 찢어져 발생하는 극단적 비효율의 피해는 결국 국민들이 떠안아야 한다. 새 정부 출범의 활기가 남아 있고 세종청사 개청 5년을 맞은 지금이 이 문제를 해결할 적기다. 언제까지 이런 식의 임기응변으로 나라 행정이 굴러가게 내버려둘 순 없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가상통화 자료 유출#세종청사#세종청사 개청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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