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시를 잊은 그대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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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프리랜서 VJ
정성은 프리랜서 VJ
살면서 들어본,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말 중 하나는 영화 동아리 선배의 고백이었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영화를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했는데, 첫째는 그 사람이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저 선배,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어?’ 24세의 나는 세련된 인간이라면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나는 한 번도 외로워서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선배를 이해하게 된 날이 있었으니, 그날은 처음으로 시집을 산 날이었다.

독립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생기는 것이었다. 가족이 만드는 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땐 팟캐스트지” 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의 권유로 신형철 평론가편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때 흘러나온 게 김소연 시인의 시였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빨래를 널다 자세를 고쳐 앉아 가만히 듣는다. 슬픔이 말라간다는 건, 슬픔이 옅어진다는 걸까, 더 슬퍼진다는 걸까.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말들이 입가에 맴돌던 날들이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혼자인 시절이었다. 시는 불친절한 것인 줄 알았는데, 성긴 틈 사이로 곁을 내주는 장르였다. 시는, 나를 궁금히 여겨 주었다.

그렇게 사 모으기 시작한 시집이 한 권, 두 권. 선배의 영화만큼 쌓여 갈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시를 읽고 좋은 순간은 자주 오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의중을 알 수 없었고, 숨기는 것에 능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유독 친밀해지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소리 내 불러줄 때’였다.

아, 이 낯설고 간지러운 느낌이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쑥스러워서 그런가.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시끄러운 북카페였다. 하지만 조용히 혼자서 시를 낭독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는 달라졌다. “거칠게 말하면 연기? 내 안에 숨어 있던 연기 본능을 깨울 수 있어요. 또 다른 자아가 되는 기분이랄까.” 최근 낭독의 즐거움에 빠져 밤마다 심보선의 시를 읽는다는 친구는 말했다. “아직 남 앞에서는 못 하겠는데, 혼자 있을 때 눈치 안 보고 막 하니까 재미도 있고, 연기하듯 상황에 심취해 읽으니 시가 더 깊이 들어오더라고요.” 시가 어렵다면 낭독을 권한다.

가을엔 시를 읽자. 당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를 한번 골라 보자.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서효인, ‘여수’). 눈 딱 감고 전하자, 남편들아.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심보선, ‘축복은 무엇일까’). 아이 사진 그만 올리라고 화내지 말고 오늘은 이 시를 보내자, 미혼의 친구들아. ‘어때요 당신이 나의 남자인 것처럼 어제는’(유진목, ‘어제’). 내가 이런 시 가르쳐 줬다고 밤에 자꾸 연락하지 말고.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오은, ‘계절감’). 우리 이 짧은 가을, 오래 누리자.

혹시 그래도 시 낭독이 부끄럽다면, 다음 주에 개봉하는 영화 ‘시인의 사랑’을 보러 가자고 하자. 깡패인 줄만 알았던 양익준 배우가 시인이 되어 주옥같은 시들을 낭독한다고 하니 기대하시라. 당신 대신 영화가 속삭여줄 것이다.
 
정성은 프리랜서 VJ
#영화 시인의 사랑#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시집#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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