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들어본,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말 중 하나는 영화 동아리 선배의 고백이었다. “나는 외로울 때마다 영화를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흠칫했는데, 첫째는 그 사람이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저 선배,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어?’ 24세의 나는 세련된 인간이라면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나는 한 번도 외로워서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선배를 이해하게 된 날이 있었으니, 그날은 처음으로 시집을 산 날이었다.
독립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건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생기는 것이었다. 가족이 만드는 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땐 팟캐스트지” 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의 권유로 신형철 평론가편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때 흘러나온 게 김소연 시인의 시였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빨래를 널다 자세를 고쳐 앉아 가만히 듣는다. 슬픔이 말라간다는 건, 슬픔이 옅어진다는 걸까, 더 슬퍼진다는 걸까.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말들이 입가에 맴돌던 날들이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혼자인 시절이었다. 시는 불친절한 것인 줄 알았는데, 성긴 틈 사이로 곁을 내주는 장르였다. 시는, 나를 궁금히 여겨 주었다.
그렇게 사 모으기 시작한 시집이 한 권, 두 권. 선배의 영화만큼 쌓여 갈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여름 밤의 꿈처럼, 시를 읽고 좋은 순간은 자주 오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의중을 알 수 없었고, 숨기는 것에 능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가 유독 친밀해지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소리 내 불러줄 때’였다.
아, 이 낯설고 간지러운 느낌이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쑥스러워서 그런가.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시끄러운 북카페였다. 하지만 조용히 혼자서 시를 낭독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는 달라졌다. “거칠게 말하면 연기? 내 안에 숨어 있던 연기 본능을 깨울 수 있어요. 또 다른 자아가 되는 기분이랄까.” 최근 낭독의 즐거움에 빠져 밤마다 심보선의 시를 읽는다는 친구는 말했다. “아직 남 앞에서는 못 하겠는데, 혼자 있을 때 눈치 안 보고 막 하니까 재미도 있고, 연기하듯 상황에 심취해 읽으니 시가 더 깊이 들어오더라고요.” 시가 어렵다면 낭독을 권한다.
가을엔 시를 읽자. 당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를 한번 골라 보자.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서효인, ‘여수’). 눈 딱 감고 전하자, 남편들아.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심보선, ‘축복은 무엇일까’). 아이 사진 그만 올리라고 화내지 말고 오늘은 이 시를 보내자, 미혼의 친구들아. ‘어때요 당신이 나의 남자인 것처럼 어제는’(유진목, ‘어제’). 내가 이런 시 가르쳐 줬다고 밤에 자꾸 연락하지 말고.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오은, ‘계절감’). 우리 이 짧은 가을, 오래 누리자.
혹시 그래도 시 낭독이 부끄럽다면, 다음 주에 개봉하는 영화 ‘시인의 사랑’을 보러 가자고 하자. 깡패인 줄만 알았던 양익준 배우가 시인이 되어 주옥같은 시들을 낭독한다고 하니 기대하시라. 당신 대신 영화가 속삭여줄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