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문재인 대 문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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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박근혜 정부 3년 차 당청(黨靑) 요직은 공교롭게도 이회창 사람들로 채워졌다. 여당 대표 김무성은 이회창의 비서실장을 했고, 원내대표 유승민은 이회창 캠프의 정책을 조율한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냈다. 대통령비서실장 이병기는 2002년 대선 당시 정치특보로 보좌했다. 당청의 핵심 인사들을 단순한 ‘원박’(원래부터 박근혜 사람)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이회창은 김종필 부인 상가를 방문해 “정치는 남가일몽(南柯一夢·헛된 꿈이라는 뜻)”이라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 당청 라인에 포진한 이회창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과 맞붙은 박지원은 ‘실패한 이회창’론으로 문재인을 집중 공략했다. 두 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이회창이 당권 탈환에 집착해 대선 승리를 놓쳤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요즘도 사석에서 “이회창도 9년 10개월 동안 대선후보 1위를 달렸지만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아직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이면서도 대선주자 행보를 하는 문재인의 엉킨 스텝을 꼬집고 있다.

물론 박지원식으로 이회창이 대선 전에 당 대표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결정적 패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회창의 뒤를 이은 박근혜는 2012년 대선 전에 사실상 당 대표 역할을 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은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를 끊임없이 흔들었던 당시 민주당 상황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당 대표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변수가 아니다. 오히려 당 대표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핵심은 혁신과 변화를 선도했느냐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는 당 내부를 향해 혁신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성장 대세론에 경제민주화로 반격하며 내전을 촉발한 것이다. 새누리당의 변신은 그 내전의 성과물이었다.

문재인도 ‘변신’에 나서고 있다. 진보좌파 진영과 거리를 뒀던 경제와 노인, 안보라는 3대 이슈를 적극 공략하고 있다. 경제정당을 내걸고, 노인층을 챙기고, 문재인이 야당 대표로서 26일 천안함 폭침 5주년 공식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문재인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한 원로는 23일 문재인을 만나 “경제정당을 아주 잘하고 있다. 이대로만 하면 (당신이) 정권을 잡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재인도 적극 화답했다는 후문이다. 야권에서 ‘문재인 대세론’이 움트는 모양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변신’의 한계도 엿보인다. 논란이 될 만한 뜨거운 이슈는 외면한 채 ‘문재인표 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 안팎의 강경파 눈치를 살피는 행보다.

문재인은 아직도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해 야당안 공개를 꺼리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추진했던 일을 떠올리면서도 눈앞의 ‘공무원표’가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미중이 격돌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에 대해선 더 어정쩡하다. 자신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고 우리 외교가 문제라는 질책만 있다. 이완구 국무총리 인준이 쟁점이 되자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엉뚱한 카드를 꺼낸 것도 눈치 보기의 전형이다. 당 안팎의 강경파를 의식하다 보니 자신의 태도는 애매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이 자리에 문재인의 생각과 비전은 들어설 틈이 없다. 대선주자에게 자신만의 생각이 없다면 위험하다.

지금 여야 수뇌부만 보면 ‘노무현과 이회창의 2라운드’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돈다. 문재인은 이회창과 맞섰던 노무현 정부의 시작과 끝을 가장 가깝게 지켜본 당사자다. 문재인의 승부는 결국 자신과 하는 것이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문재인#박근혜 정부#이회창#남가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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