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수의 오늘과 내일]자사고에 무슨 보수 진보 타령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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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자율형사립고(자사고)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제도다. 사회통합을 추구해야 할 정부가 앞장서 ‘돈 많이 내는 사람은 더 좋은 교육 받도록 해줄게’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조희연이나 이재정 같은 이른바 진보 교육감이 한 말이 아니다.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이 과거 작은 모임에서 한 말이다. ‘자사고 죽이기’는 진보 교육감들이 시작한 게 아니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지난해 교육부는 자사고 신청 시 성적 상위 50% 규정을 없애고 완전 추첨제로 바꿈으로써 사실상 자사고 폐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사고 학부모 등이 강하게 반발하자 학교별 면접을 넣는 걸로 타협했다. 교육전문가여서 발탁됐다는 서 장관은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세월호 ‘황제 컵라면’ 논란으로 물러났다.

자사고는 4대강과 함께 이명박 정부가 박근혜 정부에 떠넘긴 숙제다. 문제가 많지만 섣불리 없앨 수도 없다. 자사고는 우선 설립 취지인 고교별 다양화, 특성화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자사고에는 민족사관고 하나고처럼 전국적으로 모집하는 자사고와, 시도에서만 모집하도록 이명박 정부 때 생긴 광역 단위 자사고가 있다. 전국 단위 자사고 일부는 나름대로 특색 있는 학풍과 교육체계를 가졌다.

그러나 2010년부터 갑자기 늘어난 광역 단위 자사고는 대학입시를 위한 학원이나 다름없다. 등록금은 일반고의 3배인 연 500만 원이지만 교육 내용은 다를 게 없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이 들어가니 대학 진학률은 좋지만 학교에서 해주는 건 없다.

일반고의 황폐화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다. 자사고가 25개나 생긴 서울이 심하다. 내 친구 교사들은 “서울 강북의 일반고에서 4년 전엔 명문대를 3, 4명 갔는데 지금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3, 4명 간다”고 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아들을 일반고로 보냈다가 도저히 공부할 수 없는 분위기여서 빈자리가 있는 자사고로 전학시켰다”고 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사고를 보내자니 등록금이 비싸고, 일반고를 보내자니 대학을 못 갈 것 같아 고민”이다.

학교는 학교대로 악전고투한다. 서울 강남과 목동 일부를 제외한 지역의 자사고들은 대부분 정원 미달이다. 일반고는 정부에서 교직원 인건비 등으로 20억∼25억 원을 지원받지만 자사고는 한 푼도 못 받는다. 많은 자사고들이 학부모에게 “기부금 내라”고 요청하고 정규직 대신 계약직 교사를 채용한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을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눠 교육하는 것이다. 예부터 빈부나 계층을 초월해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나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과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한 인재들도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KAIST를 설립했다.

자사고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월성 교육 때문에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사고에 성적순으로 입학시키고 등록금을 없애는 게 낫다. 고등학교가 무상 의무교육이 아닌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에서 한국을 비롯한 6, 7곳에 불과하다. 무상교육은 못할망정 돈 있는 사람만 특별교육을 받게 하는 건 정부가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고교 의무교육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정부는 자사고 문제를 교육감들에게 떠넘긴 채 손 놓고 있으면 안 된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이 지혜를 모아 혼란을 막으면서 문제를 개선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대부분의 자사고는 수월성이나 다양화 교육을 하는 곳이 아니다. 자사고는 중산층의 교육비 부담을 더 늘리고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자율형사립고#보수#진보#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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