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9회 말 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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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엄마는 90세로 요양원에서 생활하신다. 그런데 요즈음 90세의 엄마에게서 숨은 재능을 발견했다며 친구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요양원에서 심심풀이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솜씨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엄마에게 그런 소질이 있는지 지금까지 몰랐다는 게 마음 아팠어. 진작 알았다면 엄마의 삶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텐데….”

친구의 말처럼 나이 구십에 시작한 그림이 발군의 실력인들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까지 가슴이 짠했다. 그렇다면 타고난 재능을 세상에 펼칠 기회가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며칠 전에 다녀온 이명동 사진전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95세로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사진에 헌신해온 원로가 그 연세에 첫 전시를 열었다는 점 때문이다.

1920년생이니 거의 한 세기를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사진을 시작하여 광복의 기쁨을 찍었고, 1949년에는 경교장 뜰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된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6·25전쟁을 종군 기록했으며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고발했고, 4·19혁명 때에는 경무대 앞 총알이 날아오는 현장을 기록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는 자체가 전설처럼 느껴졌다.

“꿈만 같아요. 남의 전시에 다니며 축사를 많이 했지만 정작 내가 이 나이에 전시를 연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이런 날이 오다니!”

1970년대 이전은 사진전이 드물던 시절이었고, 그 이후에는 카메라를 놓고 평론에 주력했으니 전시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 그런데 95세에 드디어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첫 전시가 성사되어 반세기도 더 지난 역사적 기록을 내보이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한 분은 “야구에서 9회 말 역전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짜릿하다”고 했다. 수없이 많은 야구경기에서도 그러한데,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9회 말 홈런은 얼마나 꿈같고 짜릿한가! 이래서 게임도 인생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 같다.

윤세영 수필가
#엄마#요양원#그림#재능#이명동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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