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허진석]윈도 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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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채널A 차장
허진석 채널A 차장
“어, 딸기가 시들었다∼!”

자신이 터뜨린 고함은 베란다에 남겨두고, 일곱 살배기 아들은 ‘최고의 속도’로 화장실로 뛰었다. 잠시 후 조심스레 들고 나타난 건, 물뿌리개. 시든 딸기 잎에 물을 뿌리고, 그 옆 토마토에도 나눠 준 뒤에야 안도의 미소를 날렸다.

옹색한 베란다에 딸기와 토마토가 자라고 있다. 작지만 제법 붉은 알맹이가 여럿 달렸다. 척박한 작은 화분인데도 말이다. 신기하다. 어른 눈에 이런데, 일곱 살이야 오죽하랴.

시골에서 자란 많은 어른이 그렇듯, 내게도 추억 속 명장면엔 ‘자연’이 있다. 압권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님은 취미 삼아 농사를 지으셨다. 집에서 30∼40분은 걸어야 하는, 저수지 인근의 작은 밭이었다.

“이렇게 왼손으로는 줄기를 땅 가까이 붙여서 잡고, 오른손 호미로는 큰 원을 상상해서 찍은 뒤 뿌리와 흙덩이가 함께 나오게 잡아당기는 거야.”

초등 2학년생은 그날 ‘와∼!, 와∼!’ 하는 탄성을 그칠 줄 몰랐다. 처음엔 잘 따라오지 않다가, 힘을 더 주면 들썩거리던 흙, 마지막 힘을 가하면 꼬마 농사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20개 안팎으로 쏟아져 나오던 뽀얀 감자들. 힘든 줄도 몰랐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다. 아버님은 그때 당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어린 아들의 모습과 개인적 추억이 겹치니 슬슬 ‘망상’이 시작됐다. ‘나도 그런 기쁨을 선사하고 싶다.’

아파트에 사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이런 난관을 극복하며 이미 실행 중인 이들이 있다. ‘윈도 팜’(Window Farm·창가 농장)을 조성하는 사람들이다.

‘농장’이 되려면 재배면적이 넓어야 하니, 식물을 베란다 창가에 수직으로 배열해 기르는 게 특징이다. 물과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하기 위해 자동으로 급배수되는 장치까지 갖추는 경우가 많다. 솜씨 좋은 사람들이 투명한 플라스틱 커피 컵이나 대형 파이프를 이용해 윈도 팜 만드는 법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뒀다. 상추를 거둬 식탁에 올릴 정도의 농사다.

윈도 팜은 수직 농장(Vertical Farm)의 일종이다. 광원까지 갖추고 실내에서 식물을 키우는 식물공장과도 연결돼 있다. 식물공장은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다면, 윈도 팜은 개인의 결단만 있으면 된다.

농촌진흥청은 화분의 흙 속에서 물이 저절로 스며들고, 발광다이오드(LED)로 빛까지 공급하는 재배기까지 개발해 보급 중이다.

기왕 한 망상을 조금 더해 봤다. 서울의 모든 주택에 이런 농장이 있으면 어떨까. 빌딩 옥상은 물론이고 빌딩 벽면에도 식물이 넘실대도록 하면 또 어떨까. 정책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면 이런 부분일 게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채소, 줄어드는 탄소발자국 얘기는 부차적인 거라고 말하고 싶다. 천방지축 날뛰는 장난꾸러기가 딸기에 물을 줄 때 느끼는 감성이 중요하니까. 그 딸기 맛있게 먹자, 추억까지 건지면 더 좋고!

허진석 채널A 차장 jameshuh@donga.com
#베란다#아파트#윈도 팜#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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