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64>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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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생신에 네 남자가 모였다. 남자들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해선 모처럼 한마음이었다. 하지만 책임 문제를 놓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과 시매부의 열변에 시아버지와 시숙이 맞서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남자들 이야기의 무덤’이라는 정치 얘기로 치달았다. 이번 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 저쪽도 잘한 게 없다는 등 논쟁이 이어졌다. 시누이가 말렸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벌써 12시가 다 됐어. 내일 우리 애 체험학습 가야 한다고 일찍 나오자고 했잖아.” 남편이 발끈했다. “내가 뭘? 지금 그까짓 체험학습이 문제야?”

아내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율배반적인 남편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방금 전까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핏대를 올리더니, 돌아서자마자 자기 가족에게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내나 아이의 권리는 티끌만큼만 생각하는 절대 군주.

남편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마디 보탰다. “아버지야 원래 그렇다지만 형은 왜 그런지 몰라. 우리 애들 살기 좋은 나라 만들자는데 그게 잘못이야?”

그녀 역시 아이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남편의 주장에는 적극 찬성이다. 다만 남편의 모순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이다. 남편뿐이 아니다. 시댁 남자들 모두가 그렇다. 민주주의를 놓고 다투면서도 그 근간이라는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자기 가족에게는 유독 적용하지 않는다. 처자식을 ‘별책 부록’ 취급하면서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친정 역시 다를 바 없다. 아빠나 남동생에게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한두 번 느낀 게 아니다. 큰일을 논해야 커다란 남자라고 믿는 듯한 분위기. 답답해서 한마디 하면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어딜 감히 나서느냐”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우리 사회의 ‘가만히 있으라’는 뿌리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다.

그녀는 며칠 전 남편과 영화 ‘역린’을 보았다. 요즘 대세라는 정조(현빈)의 한마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 남편은 그 말을 휴대전화 화면에 띄워놓고도 여전히 ‘큰일 하는 남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큰일만 하는 남자들이 넘치니까, 작은 틈 같은 것은 외면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니까, 대한민국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기우뚱 균형을 잃고 때로는 좌초하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잠든 사이 그의 휴대전화 화면을 이렇게 바꿔놓았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도 함께 바꿔라.’

한상복 작가
#민주주의#대화#타협#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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