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황제노역’ 판사의 아파트 거래, 사표로 끝날 일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1일 03시 00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항소심에서 일당 5억 원의 ‘황제 노역’ 판결을 내린 장병우 광주지방법원장이 사표를 냈다. 장 법원장은 2007년 5월 대주건설이 분양한 광주의 188m²(약 57평) 아파트에 입주했고, 5개월 뒤 대주그룹 계열사인 HH개발에 옛 아파트를 2억5000만 원에 팔았다. 이 아파트 거래가 알려져 향판(鄕判·지역법관)과 지방토호 유착 논란이 거세지자 대법원에 팩스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장 법원장은 “아파트 처분이나 취득 과정에서 어떠한 이익도 취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4억5000만 원에 분양받은 아파트에 대해서는 은행대출 자료 등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이 맞는지 쉽게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살던 아파트를 대주그룹의 계열사가 사들인 것은 석연치 않다. 2007년은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이사를 못 가는 사람이 수두룩했던 부동산 침체기인 데다 대주그룹에 탈세 의혹이 불거져 국세청 세무조사가 시작된 시기와 맞물린다. 당시 장 법원장은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였고 광주지법은 2007년 11월 허 전 회장에 대한 탈세와 횡령혐의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수석부장판사는 법원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주그룹이 수석부장판사에게 특혜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의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장 법원장은 “물의를 야기한 데 대해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으나 이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의혹이 제기된 만큼 대법원은 사직서를 서둘러 수리할 것이 아니라 사실 관계를 따져야 한다. ‘법관의 의원면직 제한에 관한 예규’에 따르면 비위 조사를 받고 있는 법관은 원칙적으로 의원면직이 불가능하다. 국민의 법감정을 고려한다면 대법원은 장 법원장을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할 필요가 있다.

29년 동안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근무한 향판인 그에 대해 “선고 당시 각계에서 탄원서와 호소문이 빗발쳐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동정론도 없지 않다. 박광태 광주시장과 박준영 전남지사 등 지역 기관장과 경제계가 선처를 호소했고, 1심 검찰 구형부터 2심 선고까지 봐주기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최근 재벌 총수에 대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정찰제 선고’는 사라지는 추세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논란을 불식하고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서울 다르고 지방 달라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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