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기흥]YS, MB, 박근혜의 인도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기흥 논설위원
한기흥 논설위원
김대중(DJ) 대통령은 북한에 쌀을 많이 줬지만 먼저 준 건 김영삼(YS) 대통령이다. 1995년 6월 16일 YS는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을 베이징에 비밀리에 보내 북한 측과 쌀 협상을 벌였다. 6월 21일 ‘우리 측은 북한 측에 1차로 쌀 15만 t을 인도하며, 이 1차분은 전량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합의가 나왔다. 분단 후 첫 대북 식량지원이었다. 정부는 그해 9월 쌀 회담 결렬 뒤에도 국제기구를 통해 매년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다.

YS가 시종 북한에 우호적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전격 선언하자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선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뒤통수를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북핵 위기는 1994년 6월 미국이 영변 폭격을 검토하는 단계로 치달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대화를 통한 핵문제 해결의 물꼬를 텄고 그해 10월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이듬해 식량난이 점점 악화되자 북한은 미국 일본에 긴급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만 나 몰라라 하기 어려웠다.

그 무렵 주미 한국대사관의 통일부 주재관이었던 양창석 씨의 얘기다. “김영삼 정부는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위해 식량 지원을 어느 정도 할지 고민에 빠졌다. 국무부 고위 관료는 내게도 ‘영양실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북한 어린이들이 장차 어른이 돼 한국에 반감을 가지면 통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며 식량지원을 촉구했다.” 결국 정부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곳간을 열었다. 하지만 북한의 동해 잠수함 침투, 황장엽 망명 사건 등으로 남북 관계는 오히려 얼어붙었다.

같은 보수 성향이지만 이명박(MB) 대통령은 달랐다. DJ, 노무현 정권 10년간 북한에 대규모 지원을 하고도 핵·미사일 개발과 잇단 도발을 막지 못했다고 판단해 그는 북한에 단 한 톨의 쌀도 주지 않았다. 당국 차원의 인도적 무상 지원도 2010년 183억 원을 준 게 전부다. 그때 유행한 신종플루 치료와 신의주 수해 복구를 위해서였다. 취임 첫해인 2008년 금강산 관광객 총격 살해에 이어 핵실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을 끊임없이 저지른 북한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 정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MB 때 남북 관계는 YS 이후 가장 냉랭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 간 신뢰를 쌓고 평화를 정착시켜 통일 기반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안보 면에선 진보정권보다 엄격하고 교류협력 면에선 과거 보수정권보다 유연하다. 전임자들이 추진한 대북정책의 득실을 따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책을 내놨다. 문제는 북한이다. 박 대통령 취임 후 아직 실제 도발은 없었지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이 있어도 우선 ‘영유아·임산부 등 취약계층 대상 순수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추진하겠다’는 다짐은 꼭 지켰으면 한다. 이를 미루다간 통일 후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반도 남쪽을 빈곤에서 해방시켰듯이 딸인 박 대통령은 북쪽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안보엔 단호하되 인도적 사안엔 따뜻할 수 있다. 만에 하나 북 정권을 돕는 셈이 되더라도 그런 지원을 ‘퍼주기’라 하는 건 온당치 않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김대중#김영삼#박근혜#북한#한반도 신뢰프로세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