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보험가입자 주머니 터는 보험사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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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미국 뉴저지 주(州) 보험사기검찰국의 인터넷 홈페이지 초기 화면은 독특하다. ‘보험사기의 끝은 어디인가’라는 질문 아래 눈에 띄는 글자로 “감옥(PRISON)”이라고 쓰여 있다. 형식만 약간 바꾼 동일한 문답을 두 곳에 배치해 주목도를 높였다. 박흥찬 금융감독원 보험조사국장은 “보험사기 범죄를 엄격히 처벌한다는 당국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형법에 보험 남용죄를 명시해 보험금을 노린 재물 손괴나 신체 손상 행위를 단죄(斷罪)한다. 중국과 이탈리아, 미국 캘리포니아 주도 보험사기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을 형법에 넣었다. 뉴욕 주는 형사 처벌과 함께 보험법에 민사 책임 조항도 추가했다.

한국은 보험사기의 폐해에 둔감한 편이다. 갖가지 방법으로 보험금을 빼먹는 속임수에 대한 죄의식이 다른 나라보다 약하다. 병원과 결탁한 ‘나이롱환자’라는 말도 생겼다. 금감원이 적발한 연간 보험사기 가담자 수는 2009년 6만3360명에서 2012년 8만3181명으로 늘었다. 보험사기 금액도 같은 기간 3367억 원에서 4533억 원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12월에도 굵직굵직한 보험사기극이 잇따라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은 멀쩡한 손가락과 발가락을 고의로 부러뜨리는 ‘골절치기’ 수법으로 보험금 20억 원을 챙긴 사기단을 체포했다. 전남 화순경찰서는 상습적으로 나이롱환자 행각을 벌여 7억 원을 받아낸 4남매와 자녀들을 입건했다. 경기 수원서부경찰서도 8년 동안 연평균 253일을 병원에 입원한 것처럼 속여 3억 원을 타낸 부부를 적발했다.

우리 형법 민법 상법 보험법 어디에도 보험가입자가 저지른 사기에 대한 별도의 처벌조항은 없다. 경제부처들은 한때 보험법에 보험사기죄를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사기죄와 구분되는 별도의 처벌조항을 둘 이유가 없다”는 법무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일본의 법률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일본도 선진국 중에서 보험 관련 강력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국가다.

보험사기범을 재판에 넘긴 뒤에는 어떻게 될까. 2011∼2012년 보험범죄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벌금형이 72%, 집행유예가 17%였다. 2년 이상의 실형 선고는 1%에 그쳤다. 김정동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법적, 제도적으로 보험사기를 장려하고 있다”고 질타한다.

보험업계의 대응도 미온적이다. 보험사기 확정 판결 후 계약해지권을 행사하는 보험사는 23개 생명보험사 중 3곳, 16개 손해보험사 중 5곳에 불과하다. 보험사기 전력자(前歷者)가 다시 쉽게 보험에 가입하거나, 보험설계사가 다른 회사로 옮겨 일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보험 소비자의 권익을 중시하는 정책을 악용해 악성 소비자(블랙 컨슈머)가 보험사를 협박하거나, 무리한 민원을 제기해 부당이득을 챙기는 일도 급증했다. 선량한 소비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과 ‘귀찮으니 일단 피하자’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거나 보험사기를 방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탕을 노린 보험사기가 살인 같은 강력범죄와 결합하는 사례도 많다. 보험사기의 1차 피해자는 보험사나 국가지만 보험료 전가를 통해 결국 다른 가입자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간다. 많은 국민이 이런저런 보험에 든 현실에서 사기가 기승을 부릴수록 애꿎은 가입자의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보험사기범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전한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들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보험사기#나이롱환자#골절치기#처벌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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