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승호]튜링의 ‘베어 먹은 사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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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영웅이 많이 있지만 공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다.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것은 독일의 암호시스템 ‘에니그마’를 푼 1943년부터였다. 튜링이 주축이 된 영국의 암호해독반이 진공관으로 작동되는 전자식 암호해독기의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작전을 훤히 들여다봤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독일군의 해안포대 배치까지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전쟁이 끝난 지 30년쯤 후였다. 종전 후 영국은 독일로부터 수거한 수천 대의 에니그마를 영연방국들에 나눠줬고, 이를 ‘완벽한 암호’라고 생각한 연방국들은 에니그마를 통해 비밀을 주고받았다. 영국은 가만히 앉아서 정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튜링 팀에서 일하던 한 장교가 “영연방국들이 더이상 에니그마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비밀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다가 1974년 비밀을 폭로하는 ‘울트라 시크릿’이라는 책을 썼다.

▷튜링이 고안한 암호해독기는 ‘만능기계’(컴퓨터)의 초보적인 형태다. 그는 암호해독기를 만들기 전인 1936년 발표한 논문에서 컴퓨터의 개념을 확립했다. 종전 후 그는 “부품을 추가하지 않고 프로그램만 바꿔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만능기계를 만들겠다”며 영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나의 기계를 계산표(스프레드시트)로, 문서작성기로, 데이터 관리기로 자유로이 쓸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다.

▷몇 년 후 동성애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범죄자로 몰렸고 1954년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베어 먹고 자살했다. 하지만 그의 만능기계 아이디어는 훗날 폰 노이만에 의해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으로 실현된다. 애플사가 ‘베어 먹은 사과’를 회사 로고로 삼은 것도 컴퓨터 개념을 최초로 구상한 튜링에 대한 오마주(존경심의 표현)라는 설이 있다. 튜링이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23일 사후 59년 만에 영국 정부에 의해 사면됐다. 지난 일들 중에 사면복권을 받아야 할 일이 비단 동성애뿐일까.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제2차 세계대전#앨런 튜링#에니그마#암호해독#애플#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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