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히스테리시스(Hysteresis)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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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개인적으로 세계경제가 건강한지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생체신호를 확인하는 곳은 런던도, 프랑크푸르트도, 도쿄도, 뭄바이도 아니다. 바로 서울이다. …한국은 숨 가쁘게 변화하는 산업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항상 최첨단의 위치를 고수하는 나라다. …사람들은 한국을 아시아의 독일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한국만이 세계에서 유일한 금메달리스트 후보로 우뚝 설 수 있다.’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신흥시장부문 사장은 ‘2022 세계경제의 운명을 바꿀 국가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저서 ‘브레이크아웃 네이션’에서 한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책 초판이 국내에서 발행된 지난해 8월만 해도 공감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뉴스가 적지 않게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출구전략을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나라로 캐나다, 호주와 더불어 한국을 꼽았다. 외국인들이 9월 한 달 동안 한국 주식시장에서 월 기준 사상 최대 규모인 8조3000억 원어치의 주식을 사들인 것을 보면 IMF와 비슷한 견해가 국제금융계에 널리 확산돼 있는 듯하다.

주요 경제지표의 움직임에서도 희망의 싹을 읽을 수 있다. 올해 경상수지흑자는 사상 최고기록을 깰 것으로 전망되고 물가는 안정돼 있다. 실물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던 대표 업종 중 하나였던 조선업은 호전되는 징후가 완연하다. 올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직전 분기 대비 1.1% 성장해 9분기 만에 0%대 성장의 늪에서 벗어났다.

한국은행이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낮춘 것을 보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에 앞서 잠시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인디언 서머’일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 경제 각 분야에 온기가 돈다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청년들의 일자리 시장이다. 매년 내리막 곡선을 그려 온 청년고용률은 올해 40%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경제학에는 ‘히스테리시스’라는 용어가 있다. 경기가 나빠지면 고용이 줄어들다가도 다시 경기가 호전되면 고용이 늘어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불경기 터널이 길면 경기가 다시 살아나도 고용이 예전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다. 일손을 놓고 있는 동안 숙련도가 떨어지고, 승진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경기가 살아나도 예전처럼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 히스테리시스는 기존 직장인들에게도 큰 위협이지만, 직장에 첫발을 내디딜 기회를 원천적으로 빼앗길 처지인 청년실업자들에게는 훨씬 더 피부에 가까이 와 닿는 문제다.

우리 청년들이 히스테리시스의 포로가 되느냐, 아니면 세계경제의 금메달리스트로 도약하는 데 동참할 기회를 갖느냐를 결정할 열쇠를 쥐고 있는 곳은 국회다. 행정부는 입법수단이 아니면 청년고용률을 끌어올릴 대책이 없다며 사실상 두 손을 든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서비스 규제 완화 관련 법안과 부동산시장 정상화 법안 등 고용창출효과가 큰 법안들을 통과시킨다면 60%의 청년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이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업인들을 무더기로 국감증언대에 세워 ‘정치게임’을 벌일 궁리에만 바쁘다.

투자와 생산의 현장에 있어야 할 기업인들이 여의도로 불려 다니다 보면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리가 없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비용을 아무 죄 없는 청년들이 일자리 시장에서 영구 격리되는 것으로 대신 치르게 된다는 점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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