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주영]보부상과 함께한 청송(靑松)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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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소설가
김주영 소설가
전통사회에서는 5일장을 중심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였던 전문적 상인인 보상과 부상을 총칭하여 보부상이라 불렀다. 보부상은 상품 유통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직접 소비자들과 상대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행상’이다.

필자의 소설 ‘객주’의 배경이 된 청송에도 보부상이 있었다. 청송의 특산품인 청송백자 판매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보부상들이었다. 이들은 대다수 일정한 주거나 가족이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였고 단지밥을 해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서로 간에 친분을 맺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서로의 호칭도 ‘공원’이라 부르며 공공의 일을 한다는 자긍심을 가졌다. 비록 1930년대 후반에는 거의 소멸했지만 일부 개발이 낙후된 경북 북부 내륙지역에서는 1960년대까지 실제로 활동했다.

16세기 중반∼20세기 중반 동해안 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에 생활 용기인 백자를 공급한 곳은 청송이었다. 청송백자를 사기굴에서 꺼내는 날을 ‘점날’이라고 하는데, 점날에는 경북지역의 보부상뿐만 아니라 전국의 보부상들이 몰려와 사기굴에 딸린 움집이나 주막에서 단지밥을 해먹으며, 양질의 청송백자를 구입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그들은 청송백자를 등에 지고 웃화장공방에서 산자락길로, 벼랑길로 부남앙숙, 죽창, 영천, 화목을 거쳐 경산 화양장으로 갔으며 구천, 갈미, 도평, 화목을 거쳐 의성으로 갔고 신점, 청송, 파천, 진보, 방전, 입암, 영양, 고초령, 매화장을 거쳐 울진과 동해안으로 가서는 청송백자를 팔고 소금과 해산물을 사가지고와 청송 경제에 이바지했다. 청송군의 보부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보부상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도 산중의 지름길을 이용하여 감쪽같이 은신하거나 재빨리 이동하는 민첩성을 지녔기 때문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의병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보부상들은 가고 없지만, 보부상들의 정신은 청송보부상길에 남아 보부상의 후예인 상공인들에게 장사꾼의 올바른 자세를 묵묵히 말해주고 있다. 필자는 이번 여름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기관에서 공동 진행하는 여름철 국내 관광 캠페인의 일환으로 독자들과 함께 우리 선조 보부상들의 발자취를 따라 청송지역을 둘러보며 보부상 정신을 배워보는 청송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온전히 남아있는 보부상길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탐방함으로써 건강한 경제교육을 받을 수 있고 또 다양한 계층이 탐방함으로써 보부상 정신을 통한 국민통합의 실뿌리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생태와 환경, 웰빙을 아우르는 문화경제교육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주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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