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파운드 속의 제인 오스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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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인생을 좌우하는 건 결혼이었다. 미모와 교양이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결혼 시장의 더 큰 무기는 집안 배경과 지참금이었다. 18, 19세기 영국에선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한 여자는 꼼짝없이 노처녀로 늙어야 했다. 청혼을 못 받아서다. 중매결혼을 했던 우리나라와 달리 그쪽 중산층 계급에선 남자가 청혼을 하고, 여자가 받아들여야만 결혼이 성립됐기 때문이다.

▷꼭 200년 전에 나온 영국의 여성작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네 가지가 다 없는 똑똑한 여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등 신랑감을 사로잡게 된다는 소설이다. 순정만화의 고전 ‘캔디’의 클래식 버전 같은 내용이어서 동서고금을 넘어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더구나 소설의 결말은 도덕적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가장 큰 축복과 행복을 차지하고, 나쁜 사람은 적절한 징벌을 받는 ‘사필귀정’이어서 책을 덮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2007년 영국 독자들이 가장 귀중한 책으로 ‘오만과 편견’을 꼽은 것도 이 때문일 듯하다.

▷영국 중앙은행(BOE)이 현재 10파운드 지폐 속의 인물인 찰스 다윈을 2017년부터 제인 오스틴으로 바꾼다고 24일 발표했다. 영국은 유럽연합(EU)에 속해 있으면서 유로 아닌 자국 화폐를 쓴다. 현재 5파운드 지폐 속의 주인공이 여성운동가 엘리자베스 프라이인데 내년부터 윈스턴 처칠로 교체하면서 여성이 들어간 지폐가 사라지는 데 대해 여성계의 반발이 거셌다. 역대 영국 지폐에 등장한 여성은 프라이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두 명뿐이었다.

▷자신을 꼭 닮은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 늘 훌륭한 신랑을 만나게 해줬던 제인 오스틴은 미혼으로 살다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주로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전쟁을 다뤄 ‘규방 작가’로 평가돼 왔지만 최근 들어 “약한 여주인공이 강자인 남자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은 게임이론의 대가” “소설 속에 나폴레옹 전쟁을 등장시키는 등 정치성도 적지 않다”는 평가도 받는다. 신사는 신사다워야 한다며 사회지도층의 책임을 강조했던 제인 오스틴이 찰스 다윈 식 적자생존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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