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과유불급 NLL 정치게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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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정치부장
박성원 정치부장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죽음)이 있을 줄 알았지(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새겨진 말이다. 왜 하필 쇼의 묘비명이 떠올랐을까. 여야가 1주일 동안 국가기록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대통령기록물로 보관돼 있다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없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렀을 때 말이다.

회의록 논란은 탄생부터 허무한 종말을 잉태하고 있었다. 올 2월 검찰은 지난해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을 무혐의 처분했다. 국가정보원에 보관된 정상회담 회의록의 발췌본과 원본 일부를 열람·대조한 결과 정 의원의 얘기가 ‘기본적 취지에서 사실과 부합한다’는 이유였다. 당시만 해도 여권 내부에선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부각시켜 북측에 마치 이를 인정하는 듯한 메시지를 주기보다는 조용히 묻어두고 북한의 악용을 막을 방도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정치·대선 개입 사건으로 비화되고 민주당과 좌파 진영 일각에서 대선에 불복하는 듯한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여권 내부의 평상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취임 3개월 만에 광우병 촛불사태로 허리가 꺾였던 이명박 정부 꼴이 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잇따랐다. 이런 기류 속에 등장한 게 남재준 국정원장의 정상회담 회의록 전격 공개다. 사사건건 박근혜정부의 발목을 잡으려는 강경 친노(친노무현)세력에 ‘피 흘려 지킨 해양영토선을 적장에 넘겨버린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어 영원히 재기불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는 여권 인사들도 있었다.

여기서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의 뜻을 되새기게 된다. 회의록 공개 이후 대부분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여권의 기대와 달리 ‘노 전 대통령의 회담 발언은 NLL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라는 응답이 53∼55%로 절반을 넘었다. “서해 북방·분계선을 쌍방이 다 포기하는 법률적인 이런 걸 하면 해상에서는 군대는 다 철수하며…”라며 줄기차게 NLL 무력화를 주장하는 김정일 앞에서 시종 맞장구를 치는 듯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들여다본 새누리당으로선 속이 터질 일이다.

사실 국민 가운데 대화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그 의미를 곱씹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 상당수가 발언 내용 이전에 ‘경제도 어려운데 지하에 묻힌 전직 대통령을 부관참시 하는 듯한 논란이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새누리당은 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사건, 다시 말해 노무현 청와대의 회의록 삭제 의혹 사건으로 친노세력과 민주당에 또 한 번 회심의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맞았다. 새누리당은 반전의 기회를 잡은 게 얼마나 기뻤던지 평소 침착하고 온건한 언행을 보여 온 황우여 대표가 직접 ‘사초(史草) 범죄는 참수감’이라는 극단적 평가를 내린 뒤 검찰 고발로 직행했다. 이에 민주당은 검찰 수사는 못 믿겠다며 특검 요구로 맞서고 있다. 민생은 실종된 채 정치권이 온통 ‘NLL 정치게임’에만 매몰된 시국에 대한 국민의 염증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정상회담의 기록을 폐기한 엄중한 사태의 전말은 마땅히 가려야 한다. 하지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절제력 상실 상태에선 진실을 가릴 수도, 승복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놓고 음모와 소문이 난무했을 때 연방대법원장 얼 워런에게 조사위원장을 맡겨 국론 분열을 막고 정치를 복원했던 미국의 선례를 이쯤에서 참고할 수도 있겠다.

박성원 정치부장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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