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6>너바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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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
―리산(1966∼)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걸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라! 카아! 감상주의와 감각주의의 극을 달리는 표현이다. 때는 자정 지난 깊은 밤, 애틋한 감성을 자극하는, 가령 이국의 뒷골목에 있는 것 같은 술집에 외로움과 정념의 분위기를 발산하는 남녀가 찾아든다. 그들은 아마도 각각 따로 들어왔으며, 따로 앉았으리.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만 애간장을 태우며 스쳐 보내리. 마치 3연에 등장하는 남녀처럼.

3연의 장면은 아마도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의 한 컷이리라. 여배우 장만위가 너무도 매혹적인 치파오(중국 전통의상)를 서른 벌이 넘도록 바꿔 입고 나온다는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평생 단 한 번 꽃을 피우는 화초 이름이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한다고 한다. 시 제목 ‘너바나’가 열반, 이상향, 황홀감,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불교 용어 ‘니르바나’의 영어 표기인 것과 통한다.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가 암시하듯 미국의 록밴드 ‘너바나’에서 제목을 땄을 수도 있겠지만.

시의 기저에 먼 데에 대한 동경과 이국 취향이 깔려 있는데, 탁 쪼개면 과즙이 주르륵 흐르는 수박처럼 감성의 물기로 꽉 차 있어 이만저만 감각적이고 분위기가 있는 게 아니다.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라는 표현을 보라! 그 허기는 연인에 대한 허기일 것이며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일 것이다. 비릿하고도 청량할 듯한 ‘청어 향수’ 냄새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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