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추임새 유감(有感)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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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소리꾼이 창(唱)을 하는 중간에 고수(鼓手)가 ‘얼씨구’ ‘좋다’ ‘그렇지’ 등 흥을 돋우기 위해 넣는 소리가 추임새다. 적시에 추임새를 넣는 기술은 가락을 타는 북장단, 바른 자세와 함께 좋은 고수가 갖춰야 하는 3가지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의 판소리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청년층이 즐기는 힙합 음악에서 ‘체크 잇 업(check it up)’ ‘예∼에(yeah∼yeah)’ ‘풋 유어 핸즈 업(put your hands up)’ 같은 추임새는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래퍼의 중요한 테크닉이다.

이달 초 추임새가 난데없이 수난을 겪었다. 서울시교육청이 인성교육 차원에서 추진하는 ‘정약용(정직, 약속, 용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서울의 한 초등학교가 ‘대화하거나 교사 말을 들을 때 긍정적 추임새를 잘하는 학생에게 매달 품격 어린이상을 준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정리정돈 하기’ ‘친구 칭찬하기’ ‘쓰레기 줍기’ 등 미션들 중 하나였다. 이와 관련해 교사와 학부모들 사이에서 ‘구시대적 교육방식’ ‘인성과 관계없는 억지 교육’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열거된 항목들은 오래전 국민학교 학급회의 때 안건들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올 만큼 충분히 복고적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추임새 하기’가 유독 구시대 인성교육의 대표격으로 집중타를 맞는 걸 보며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20년간 기자로 일하며 갈고닦은 핵심 취재기술 중 하나였고, 직장 동료들과 관계를 한결 부드럽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추임새가 저렇게 지탄받을 일이었다니. 그래서 문제가 된 가정통신문을 자세히 살펴봤다. ‘추임새 하기’의 평가 요소로 “대화할 때, 선생님 말씀을 들을 때 눈 마주보기, 긍정의 추임새 하기, 함께 생각하기 등”이라고 적혀 있었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몇 해 전 가족과 미국에 연수를 갔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현지 선생님에게서 가장 많이 지적받은 게 ‘아이 콘택트(eye contact)’, 즉 눈 맞추기였다. 어른 말씀을 들을 때 눈을 내리깔도록 배우는 한국과 달리 서양 아이들은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도록 교육받는다. 눈을 피하는 건 뭔가 속이고 있거나, 켕기는 게 있어서라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게다가 제대로 교육받은 미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Really?(정말?)’ ‘Oh My God!(세상에나!)’ 등 상대방의 쉴 새 없는 추임새에 황송할 정도다. “엉성한 내 영어를 참 열심히 들어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건 물론이다.

선생님에 대한 추임새 넣기가 문제가 된 건 한국 사회에서 추임새와 ‘아부’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다. ‘아부하는 아이에게 상을 준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눈 맞추기, 추임새 넣기는 글로벌 시대에 꼭 필요한 ‘소통의 기술’이자 상대에 대한 에티켓이다. 한국인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표적 덕목이기도 하다.

사춘기 자녀를 키워본 부모, 선배보다 후배가 많을 정도로 직장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은 안다.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꾸도 않는 대화 상대가 사람 속을 얼마나 뒤집어 놓는지를. 선생님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얘기할 땐 선생님 눈을 봐 달라, 선생님이 말할 때는 대꾸를 해 달라”는 선생님들의 호소에 공감이 가는 내가 이상한 걸까.

정부, 정치권의 소통 부재가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지적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일 수 있다. 추임새 넣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이다. 자주 화제가 되는 ‘박근혜 레이저’ 역시 추임새 정신과 거리가 먼 일방적 의사전달법이다. 고수가 추임새와 북장단을 제대로 넣으려면 반드시 오랜 경험과 노력이 축적돼야 한다. 그래서 ‘소년 명창(名唱)은 있어도 소년 명고(名鼓)는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아이가 다른 무엇보다 추임새 넣기 하나만큼은 학교에서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추임새#정약용 프로젝트#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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