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국산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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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지하철을 타면 소소한 물건을 파는 상인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날도 차내 소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상인이 열심히 상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이거 국산입니다. 국산!”

국산을 강조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포스터와 표어의 주제가 대부분 ‘반공’ 아니면 ‘국산품 애용’이었다. 공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펑펑 나오는 장면을 멋지게 그리고 그 밑에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상투적인 말을 써넣곤 했다. 당시에 국산품은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취약했다.

“이거 이래봬도 가짜 미제 청바지야.”

1970년대 초, 가짜여도 미제 상표가 붙은 물건이 더 자랑스러웠던 한 친구의 말이다. 양담배를 피우면 벌금을 내야 했던 서슬 퍼런 시대에도 국산품을 애용하라는 으름장과 하소연이 먹혀들지 않았는데 가만 두어도 ‘국산’을 내세우는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는데, 힘깨나 쓰는 대신들이 모여 앉아 중국에서 들어온 귀한 물건이라며 감탄하는 장면에서 다시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당시 중국 물품을 흠모하는 말과 오늘날의 중국산에 대한 이미지가 대비되어서다. 조선시대 조상님들이 오늘의 상황을 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실없는 상상을 해본다.

언제부턴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 귀국 보따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세계적인 명품이야 어차피 나의 주머니사정 밖에 있고 나머지는 국산품보다 나을 게 없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도 쇼핑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한때 일본에서 코끼리밥통을 사들고 줄지어 귀국하던 공항의 진풍경을 떠올리면 지금 우리의 두 손은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운지!

손만 가볍고 자유로운 게 아니다. 지난 시대에는 하지 말라는 규제도 창피한 수준이어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수돗가에 가면 ‘물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화장실에 가면 ‘화장지를 가져가지 마시오’, 공원에 가면 ‘잔디에 들어가지 마시오’ ‘나무를 꺾지 마시오’, 극장 앞에서는 ‘암표를 사지 마시오’ ‘새치기하지 마시오’ 등등 도처에 가르침이었다. 대놓고 초등학생 취급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수준의 문구는 벗어버린 것 같다.

“국산입니다∼.”

소리 높여도 좋을 만큼 국산품 수준과 시민의식은 정비례하고 있을까. 지난 시대에 비하여 하라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도 많이 줄어든 이 시대에 초등학생들은 무슨 표어를 짓고 어떤 포스터를 그릴까, 문득 궁금하다.

윤세영 수필가
#국산#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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