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경준]당신은 바통을 넘길 준비가 돼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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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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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혁신의 대명사’ 애플이 흔들리고 있다. 애플은 1∼3월 석 달 동안 약 10조4500억 원의 순이익을 냈다. 엄청난 돈이지만 사람들은 1년 전보다 이익규모가 18% 이상 줄어들었다는 데 주목했다. 이 회사의 전년 동기대비 순이익이 줄어든 것 자체가 10년 만에 처음이다.

주식시장은 실적보다 먼저 움직여 애플의 주가는 사상 최고치였던 지난해 9월보다 40% 이상 폭락했다. 애플은 대규모 회사채 발행으로 실탄을 마련해 자사주를 사들이고 주주 배당도 늘리겠다고 했지만 성난 주주들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팀 쿡 최고경영자(CEO) 경질설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실 팀 쿡은 준비된 CEO였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는 2011년 세상을 떠나기 한 달여 전 그를 차기 CEO로 지명하면서 무한한 신뢰를 표시했다. 2004년과 2009년, 2011년 초 병가(病暇)를 낸 잡스의 공백을 메운 이도 쿡 CEO다. 하지만 그는 잡스 사후 이렇다 할 혁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애플의 경영 승계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매끄럽지 않다.

사유는 다르지만 국내에도 오너의 부재로 곤경에 처한 굴지의 기업들이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을 대신하기 위해 최근 비상경영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회는 출범 1주일 만에 오랫동안 미뤘던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했다. 새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투자도 할 예정이다. 그러나 김 회장의 빈 자리는 커 보인다. 이라크에서 비스마야 신도시를 조성하고 있는 한화는 11조 원 규모의 추가 일감을 따내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지만 불투명해졌다. 김 회장은 최근 측근에게 “자유로운 몸이 되면 가장 먼저 이라크에 가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그룹 지배구조 혁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화의 그것과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을 대신하는 기구다. 협의회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을 뜻하는 ‘수펙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룹 내 계약직 58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통 큰 결단도 내렸다. 하지만 글로벌 사업에선 ‘최태원’ 브랜드를 대체할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업체 페르타미나가 발주한 4조4000억 원 규모의 석유화학시설 수주 경쟁에서 태국 업체에 밀린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는 2005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 때 최 회장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뒤 공들여온 시장이라 SK의 충격은 컸다.

경영승계는 흔히 육상경기의 이어달리기에 비유된다. 애플, SK, 한화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너가 아니라 월급쟁이 사장이라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1600m 계주의 주자다. 트랙을 한 바퀴 돌아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잘 넘겨줘야 한다. 1등으로 달리고 있다고 치자. 수만 명의 관중이 환호한다. “달려, 달려!” 1등보다 한두 발짝 뒤진 2등이나 3등이면 또 어떤가. 조금만 더 시간을 준다면 코앞에 있는 경쟁자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앞선다. 숨은 가쁘지만 전력 질주한다. 그런데 어느덧 바통 터치 존이다. 당황한 다음 주자는 당신이 불쑥 내민 바통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매끄럽게 전달하려면 적절한 때에 속도를 줄여야 한다. CEO도 어느 순간부터는 후계자를 위해 가진 것들을 서서히 내려놓아야 한다. 돈도, 명성도, 권력도, 일하면서 느끼는 행복도 내려놓아야 한다. 쉽지는 않다. 부하를 호출하는데 응답이 조금만 늦으면 레임덕(권력 누수현상)이라는 단어가 아른거린다. 이른 시간에 집을 ‘방문’하면 배우자도, 자녀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극복해야 한다. 이어달리기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경영도 당대(當代)의 영화가 목표가 아니니까. 자, 당신은 바통을 넘겨줄 준비가 돼있는가?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애플#SK#한화#경영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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