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통일부의 ‘잃어버린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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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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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2007년 말 이명박(MB) 정부 출범 확정 전부터 보수진영에서는 통일부가 정리 대상 1호였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정부 10년 동안 진행된 대북(對北) 포용정책 추진의 전초기지였다는 원죄(原罪) 탓이다. 무분별한 퍼 주기는 독재자의 배를 불려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가능하게 한 토양을 제공했고 민족공조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한미동맹의 근본이 흔들렸다는 것이 MB와 ‘개국공신’들의 공통인식이었다.

통일부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지만 조직 구성원들에게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4, 5층에 위치한 통일부는 흡사 패잔병의 임시 거주지 같았다. 그해 10월 평양 2차 남북정상회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고경빈 정책홍보본부장이 불도 켜지 않은 집무실에서 신변정리를 하던 모습은 자못 비장해 보였다. 대북화해협력 정책을 ‘역사의 정의’라고 믿었고 대북 강경파에 대해 “역사에 죄(罪)를 짓지 말라”는 독설(毒舌)도 서슴지 않았던 소신파이다.

지난주 모처럼 통일부를 찾았다. 과거 정부가 이룬 남북 간 ‘역사적’ 합의를 기념하는 사진이 사라진 자리를 대형 백자가 차지했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통일항아리다. 6월 말 통일정책실장이 된 천해성 실장은 “축하보다는 ‘어쩌다 그 자리에 갔느냐’는 위로가 더 많았다”며 농담 반 진담 반이다. 임기 말 공무원들은 청와대 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가문의 영광이라는 1급 공무원이 안 되려고 사력을 다하는 세상이다.

이래저래 통일부의 ‘잃어버린 5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남북관계가 전반적으로 퇴조했고 북한은 툭하면 조국통일의 성전(聖戰) 운운하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진보정권 탈환을 부르짖는 민주통합당 등 야권은 다 죽어 가는 통일부를 살려줬더니 10년 ‘햇볕’으로 쌓아 올린 금자탑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여권에서도 대북 대화채널도 유지하지 못한 채 이산가족 상봉도 못 시키는 통일부를 향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임 정권의 통일부가 지나친 의욕 과잉으로 무리한 성과에 집착한 탓에 비판을 자초했다면 현재의 통일부는 불임 부처에 가까운 무능력을 지적받고 있다. 남북관계야 상대가 있는 것이니 3대 세습정권을 안착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북한에 책임을 돌릴 수 있지만 야심 차게 제시한 통일 준비 어젠다 역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치밀하고 내실 있게 추진해야 할 통일 준비를 이벤트처럼 추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하고 있다.

통일부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미스터 유연성’을 자임한 류 장관은 부분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꾀했고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급사(急死) 때 본인이 직접 방북해 조의(弔意)를 표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전임 김하중, 현인택 장관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워낙 깊었고 북한 내부적으로는 대화파가 대거 숙청당하면서 대화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하소연이다. 연평도 포격과 연이은 핵실험 등에 나서고 있는 북한에 무리한 보상을 약속하면서까지 대화를 강행할 수는 없었다는 항변도 일리는 있다.

핵을 폐기한 북한과의 평화가 보장돼야 남북관계의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기본원칙을 지킨 통일부가 남은 임기에 해야 할 마지막 과제는 역대 정부가 추진한 대북정책의 공과를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평가해 문서화하는 일이다. 후임 정부 대북정책의 판단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정권의 변화에 따라 갈지자처럼 오락가락한 대북정책의 일관성 확보에도 기여할 수 있는 대헌장(大憲章)을 만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새 정부의 통일부에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려야 할 것이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오늘과 내일#하태원#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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