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유재동]“서방의 신 포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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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기자
유재동 경제부 기자
이번 올림픽에서 모두가 한국의 선전에 환호하고 오심 퍼레이드에 분노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만한 사건 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레이스 막판 무서운 스피드로 수영 금메달을 거머쥔 한 소녀 선수 얘기다. 16세인 중국의 예스원은 개인혼영 400m 결승에서 마지막 50m를 남자선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우승해 결국 세계기록마저 갈아 치웠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쏟아진 건 박수갈채가 아닌 의심의 눈초리였다. 작고 어린, 무명에 가까운 선수가 도저히 낼 수 없는 기록이란 것이다. 의혹 제기에 앞장선 건 서방 언론이었다. 이들은 중국 선수들이 각종 대회에서 약물 파동으로 대거 실격된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며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넘겨짚었다. 미국의 한 코치는 “수영에선 누가 ‘슈퍼우먼’으로 떠올랐다 싶으면 어김없이 약물 복용으로 밝혀졌다”며 의혹을 부채질했다.

중국인들은 흥분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중국의 성공에 대한 질투심의 극치”, “‘여우와 신 포도’의 전형적 사례”라는 글이 쏟아졌다. 나무 높이 달린 포도를 포기하면서 분명히 포도 맛이 나쁠 것이라 자기합리화를 한 여우(이솝우화)에 서방을 비유한 것이다. 급기야 논란은 중국의 국가주의 체육과 인권문제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번졌다. 한 서방 기자는 예스원에게 “중국 선수들은 메달을 따기 위한 로봇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예스원 공방’이 흥미로운 건 지금 글로벌 경제의 본모습과 헤게모니 다툼 양상이 그대로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개최국으로 세계의 이목을 모은 중국은 이번에도 가공할 경기력과 수많은 얘깃거리로 사실상 대회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다. 어느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신흥 슈퍼파워와 이를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서방 간의 신경전이 스포츠라는 형식을 빌려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서방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중국은 30년 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기적을 이뤄 냈지만 여전히 그 틀은 권위주의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다. 반면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정통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 버블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매년 8% 성장을 이어 가는 중국인들의 지갑에만 의존하는 꼴이 됐다. 중국이 예스원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신 포도로 비꼰 것은 사실 중국 경제를 바라보는 서방의 부러운 (그리고 두려운) 시선을 정확히 지칭하고 있다. 약물 의혹은 환율 조작이나 인권 탄압 등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국의 모든 면을 상징한다.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의 마음은 복잡하다. 국민소득이 5000달러 정도 됐으면 자신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받아들일 만한데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체제가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듯 더 완고하게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자신감의 원천은 물론 자국 경제다. 중국이 올림픽을 국가 파워를 과시하는 경연장으로 여기고 밀어붙이는 것 역시 경제적 자신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서구는 이 거대한 폭주 기관차가 언젠가 한계에 부닥치진 않을까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북한 경제 몰락의 이유는 분명하지만 중국의 성공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중국은 북한보다도 더 신기한 나라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의 위상과 이웃나라 국민을 전기 고문하는 후진성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그것도 한반도 바로 옆에 보란 듯 자리 잡고 있다. 우리로선 벌써 반만 년째 이어지는 고약한 숙명이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
#뉴스룸#유재동#중국#북한#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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