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중국內 한국 빈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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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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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한눈에 봐도 박 씨는 영락없는 중국 빈민이었다. 한국에서 고교 교사였던 그는 고된 중국 생활 탓에 왼쪽 위 어금니가 모두 빠져 웃는 표정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공들여 광을 냈다는 검정 구두만 그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지하 벌집에 산다. 아파트 지하를 불법으로 고쳐 만든 그곳에는 한 평에서 두 평 반짜리 방이 100개쯤 있다. 화장실 냄새와 하수 냄새, 뭔가 썩는 듯한 냄새 때문에 5분도 안 돼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곳이다. 박 씨는 한 달 방값으로 500위안(약 9만 원)씩 낸다. 그마저도 한국인 교회의 지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년이 환갑인 그는 30여 년 전 사범대를 졸업한 뒤 지방에서 교편을 잡다 사업에 눈을 돌렸다. 2006년 베이징에 와서 현지 업체와 합작으로 아파트 개발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 뒤 너무도 쉽게 최하층으로 전락해버렸다. 손실을 만회하려 다른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역시 잘 안 됐다.

그 와중에 비자가 만료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관리가 강화됐는지 비자 연장이 안 됐고 갑자기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했다. 합법적인 신분으로 사업을 할 수도, 중국에 있는 한국인 회사에 취업할 수도 없게 됐다.

처벌을 받고 귀국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가 뭔가를 다시 시작할 엄두가 안 났다. 중국 건축현장과 농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벌어 쓰다 약 1년 전 지하 벌집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됐다. 큰딸이 3년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과 상견례를 한다는 소식까진 들었지만 이후론 한국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박 씨의 사례는 중국에서 그다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벌집에 함께 사는 다른 한국인들은 이달 말까지인 당국의 불법체류자 특별 단속을 피해 베이징 외곽으로 도망간 상태다. 한국인이 많이 사는 베이징 왕징(望京)에도 벌집 거주자가 적지 않다. 벌집에서 만난 중국인 노파는 “한국인 부부도 살고 있다”고 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지난해 말 현재 한국인 불법체류자가 무려 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중 상당수는 박 씨처럼 빈민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2010년에는 한 한국인 여성이 행려병자로 발견된 적이 있고 그보다 1년 전에는 아사 직전의 40대 남성이 영사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난 사례도 있다.

중국에서 한국인이 빈민으로 전락하는 건 완고한 외국인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업이 망가진 뒤 불법체류자가 돼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13억7000만 명의 거대 시장만 보고 만만하게 들어왔다가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13억7000만 명이 잠재적인 경쟁자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수교한 지 올해로 20년. 국제 외교사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큼 양국 교류는 급속히 확대 및 발전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수교 당시에서 한두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있는 정도인 듯하다.

중국은 더이상 관시(關係·관계) 하나만 믿고 법과 제도를 무시하면서 사업을 할 수 있는 어수룩한 나라가 아니다. ‘물가가 낮으니 정 안 되면 밥은 먹고 살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이 통하는 곳도 아니다. 박 씨도 “처음 올 땐 이럴 줄 몰랐지. 돈 좀 벌면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이젠 꿈을 내려놔야지”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중국 빈민#외국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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