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화성]어느 아나운서의 ‘1948 런던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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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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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1948년 7월 11일 (런던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우리 선수단 2진 40명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 내렸다. 추웠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겨울외투를 입고 여우목도리에 털장갑을 끼었다. 유독 우리만 홍콩에서 입었던 여름옷(짧은 바지, 반저고리)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붉은 살들을 반 이상 내어놓고 섰으니, 다른 승객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마치 동물원에서처럼 들여다보았다.”

푸하하! 웃음보가 터진다.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지만 금세 짠해진다. 울컥! 가슴이 먹먹해진다.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민재호 아나운서(1916∼1987)가 쓴 책 ‘런든 올림픽 紀行(기행)’. 오래전 은퇴한 신문사 선배가 건네준 귀한 기록이다.

손에 잡자마자 빠져들었다. 가로세로 12×18cm의 손바닥만 한 책.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손으로 만지면 바스러졌다. 국한문 세로글자에 글자까지 깨알만 했다.

“마라톤 선수들은 상·중갑판을 수십 바퀴씩 빠른 걸음으로 돌았다. 자전거 선수들은 자전거를 고정시켜 놓고 앉아서 바퀴를 돌렸다. 권투선수들은 상갑판에서, 축구와 농구선수들은 각기 적당한 공간에서 볼을 던지면서 몸을 풀었다. 밤에는 선수들이 갑판에 모여 오락회를 열었다. 춤과 노래로 밤이 가는 줄 몰랐다.”

우리 선수단은 1948년 6월 21일 서울역을 출발해 7월 11일(2진 기준) 런던에 도착했다. 무려 21일이 걸렸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홍콩 공항까지 가는 데만 12일이 걸렸다. 선수들은 갑판 위에서 연습했다. 상하이에선 경마장에서 몸을 풀었다. 하지만 정작 올림픽선수촌에 들어가자, 한국선수단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다.

“1948년 7월 29일 오후 3시 런던웸블리구장 올림픽 개회식. 그 언제 우리 태극기가 어엿하게 만국기 속에서 기개 높이 날려 보았던가! 그런데 손기정 군(당시 36세)이 또 하나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들어서는 게 아닌가! 손 군은 부산에서 출발할 때 덜컥 맹장염 수술을 해야 했다. 우리 선수단은 29번째로 입장했다. 운이 좋게도 입장식에 참가한 57개국 중(일부 불참)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가) 꼭 무슨 기준국가’인 것처럼 두드러졌다. 일본은 나오지도 못했다.”

한국 선수단은 본부석을 통과할 때 화제가 됐다. ‘일제히 한 동작으로 모자를 벗어’ 말더듬이로 잘 알려진 영국왕 조지 6세에게 예를 표시한 것이다. 그 직전까지 그렇게 한 나라가 없었다. 영국 관중들은 열광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한참 동안이나 쏟아졌다. 박수로만 보면, 영국 미국 다음 세 번째였다. ‘도대체 KOREA가 어디 있는 나라인가’ 관중들이 수군댔다.

민 아나운서는 조직위 공인 한국 선수단의 ‘유일한 기자’였다. 중계하랴, 취재하랴 정신이 없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그가 1948년 런던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최초로 썼던 멘트였다.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홍일점 여자투원반 박봉식(朴鳳植)이 맨 먼저 경기에 나섰다. 선수단 최연소(18세)의 이화여중 5학년 학생. 3번 던져 겨우 한 번 성공했다. 남자투원반 안영환은 3번 모두 실패했다. 축구는 스웨덴에 0-12로 졌다. 동메달을 딴 복싱 한수안은 하마터면 링 위에 오르지도 못할 뻔했다. 오후 5시 게임을 오후 8시로 잘못 알고 밥도 안 먹고 자고 있었다.

64년 전 그때 그 시절. 순진하고 어수룩했다. 배꼽 잡을 일도, 황당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은 당당했다. 실력은 모자랐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상금은 없었지만, 열정은 숯불처럼 뜨거웠다. 2012 런던 올림픽이 딱 8일 남았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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