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담쟁이’를 흔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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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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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실장
황호택 논설실장
담쟁이는 축대나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 회색을 녹색으로 바꾸어 놓는다. 담쟁이가 붉은 벽돌 건물을 뒤덮은 경동교회는 서울 중구 장충동의 명물이다. 일상에 바쁜 사람들은 담쟁이 잎 색깔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깨닫는다. 도종환 시인의 상상력은 흔해빠진 넝쿨식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바꿔놓았다. 도 시인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 모습을 그려냈다.

한국경제신문이 2009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내 인생의 시’ 설문조사에서 ‘담쟁이’가 1위로 꼽혔다. 도 시인은 올 초 북 콘서트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전교조 일로 회의를 하는 도중에 창밖을 내다보는데 옆 건물 벽에 담쟁이가 가득 출렁이고 있었다”고 시상(詩想)이 떠오르던 순간을 회고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옆에 있는 다른 이파리들과 손에 손을 잡고 말없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에 관한 생각을 회의 서류 뒷면에 연필로 옮겼다고 말했다. 이 시에 전교조나 이 단체와 관련된 단어는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의 해설이 명시 ‘담쟁이’를 좁은 틀 안에 가둬놓는 느낌이다.

도종환 서정주 시, 교과서 실어야

전교조가 지금은 합법 단체가 돼 교육감도 여럿 배출했지만 탄생 초기에는 단순 가입만으로도 해고와 형사처벌 대상이었다. 도 시인은 전교조에 가입해 해고당하고 수감생활을 했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32세 때 아내를 여의고 펴낸 ‘접시꽃 당신’이라는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살아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는 인구에 회자되는 시구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도 시인의 시들을 교과서에서 내리라고 출판사에 권고했다가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을 받고 번복했다. 도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고, 민주당 문재인 의원 캠프의 대변인을 맡은 것에 대해 여러 갈래의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시를 교과서에서 삭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한국 시단의 고봉(高峰)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도 교과서에서 사라지는 수난을 겪었다. 지금은 심화과목인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지만, 내년에 개정되는 국어교과서에도 그의 시는 빠져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작년 신동아 8월호 인터뷰에서 “정말 좋은 시는 서정주의 시”라고 말하면서도 교과서에 싣는 데는 반대했다. 이소리 시인이 ‘서정주의 친일과 문학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말도 많은데요’라고 묻자 “그게 복잡해요. 우리 시대가 아직 정리가 안 됐기 때문에, 이 사람 시가 교과서에 실린다는 건 상당히 문제가 있죠”라고 답했다.

서정주의 고향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생가 옆에 미당 시문학관이 있다. ‘화사집’ ‘귀촉도’ ‘신라초’ ‘동천’ 같은 시집들과 함께 담시(譚詩)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도 함께 전시돼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일제강점기를 살며 ‘이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 주는 팔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다수 동포는 아마도 나와 의견이 같으실 듯하다’라고 변명했다. 민족문화와 역사를 천착한 시인으로서 친일 시작(詩作)을 하며 어려운 시대를 비켜간 것은 후세가 본받을 만한 삶의 태도는 아니다. 도 시인의 시 ‘흔들리는 꽃’처럼 ‘흔들리잖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 어디 있으랴’만 비바람 속에서 줄기를 곧게 세웠더라면 더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말의 영토를 넓힌 미당의 시들을 교과서에서 완전히 빼버리는 것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는 “미당의 시는 재미있게 읽히고 우리말이 친밀하게 표현된 독특한 시다. 우리말과 우리 유산을 즐기는 데 귀감(龜鑑)이 되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학교 교실에서 교사들은 그의 빼어난 시작들과 함께 시인에 대해서도 빛과 그늘을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찬란한 노을’은 애송시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있다…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 기쁘다…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도종환의 시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 시인은 1954년생으로 58세다. 이 시의 시간 계산법으로 하면 몇 시간 후 석양이 깃들 삶에서 그가 국회의원이나 대선 캠프 대변인이라는 자리를 ‘저물기 전의 찬란한 노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도 시인이 한국의 시맥(詩脈)에 우뚝 솟은 서정 시인으로서 ‘담쟁이’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편들을 다수 남기기를 바란다. 전교조나 캠프를 넘어, 좌와 우를 아우르는 애송시(愛誦詩)로 이 시대의 찬 가슴을 덥혀주고 한줄기 위안을 주는 것이 시인의 ‘찬란한 노을’일 것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담쟁이#우리말#서정주#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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