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美-베트남 관계와 종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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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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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베트남 남부 깜라인 만(灣)은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천혜의 전략요충지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 군수물자와 병력이 모두 이곳을 통해 베트남에 들어갔다.

이제는 어선 몇 척만 다니는 조용한 바다인 이곳에 최근 미 해군 병참지원함이 다시 들어갔다. 종전 후 처음이다. 미 국방장관은 3일 그 함정에 올라 양국의 새로운 안보협력 시대를 제창했다. 베트남 총리는 “미국이 지역안보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中 견제위해 美군함 불러들이는 베트남

베트남이 전략요충지에 미 군함을 불러들이고 미 함정이 상시 항구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문제가 거론되는 상황은 격세지감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변화다.

이를 보면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진부한 외교격언을 떠올리기보다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종전 20년 후에 국교를 맺고(1995년) 4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깊숙한 군사협력까지 논의하게 될 상대를 쫓아내겠다며 싸우다 숨진 수많은 젊은이가 생각나서다.

베트남전은 미국 등 자유세계의 입장에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민족해방전선(NLF·베트콩)에 자원한 베트남인들은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시 그들을 끌어당긴 가치는 ‘민족해방’이었다. 사실 민족해방처럼 주술적인 흡인력을 지닌 슬로건도 드물다. 한국 운동권에서 주사파가 주도권을 쥔 것도 ‘민족해방론’ 덕분이었다.

반정부 시위가 비등점을 향해 치닫던 1986년 봄까지만 해도 학생운동권의 다수는 제헌의회파였다. 그들은 한국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노동자 혁명으로 제헌의회를 소집해 사회주의를 하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는 군사독재는 몰아내고 싶지만 계급혁명에는 동조하지 않는 다수 학생과 중산층 시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때 ‘민족해방(NL)’을 주창하는 주사파는 갑자기 온건노선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들이 실제로 온건해진 게 아니다. 한국을 미국의 신식민지이며 반(半)봉건사회로 규정한 그들은 ‘반봉건사회에선 사회주의 혁명 이전 단계인 민주주의 실현이 당면 과제’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전략적 변신을 했다. 전두환 정권 축출에 힘을 모으자며 ‘직선제 쟁취’ 같은 대중적 슬로건을 외치며 재야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민족해방론’은 그처럼 뱀같이 유연하게 변신하는 논리다. 그들은 1987년에 그랬듯이 올 대선에서도 전략적으로 유연해지면서 연합전선 구축에 나설 것이다.

당시 주체사상 전파의 핵심역할을 한 서울대생 김영환 씨의 ‘강철서신’에는 베트남이 민족해방 사례로 등장하곤 했다. 김 씨는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해 지금 중국에 억류돼 있다. ‘민족해방전쟁’을 치른 베트남은 미국과 다시 손을 잡으려 여념이 없다.

재판장을 ‘미국 놈의 개’라고 부르고 ‘종북보다 종미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인사들은 중국을 견제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 군함을 불러들이는 베트남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사실 이 질문은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찌민에게 묻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민족해방’ 주창 주사파들도 배워야

베트남인들만큼 존경심이 깊지는 않겠지만 필자도 호찌민을 높이 평가한다. 베트남전의 정당성 문제와 별개의 차원에서 그의 일생을 존중한다. 평생을 일관한 독립의지, 눈감는 날까지 신독과 솔선수범을 지킨 검소한 삶….

그러나 그가 살아있다면 묻고 싶다. 그가 이끈 미국과의 전쟁은 반드시 치러야만 했던 것이었을까,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을까,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어가며 해방시켜야 할 만큼 남부 베트남은 미국의 완전한 식민지였을까….

정치인들이 좌표를 잘못 인식하면 국가라는 배는 격랑 속으로 흘러든다. 그 요동 속에서 무수한 젊은이가 갑판 너머로 떨어져 물방울처럼 사라져간다. 전쟁의 어느 편이었든, 청춘을 베트남 정글에 묻은 채 스러져갔을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미국#베트남#민족해방#주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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