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훈]상식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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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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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1992년에 발표된 영화 ‘에일리언 3’의 마지막 장면. 에일리언의 숙주가 된 우주 여전사 리플리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숙주인 자신이 죽어야 몸 안에 들어 있는 에일리언도 죽기 때문이다.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는 1979년 1편이 나온 후 총 4편이 만들어졌다. 우주 괴물이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번식한다는 설정이다. 황당할 수도 있지만 바이러스가 생물을 숙주 삼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엄연한 과학이다. 감기만 해도 200여 종이 넘는 감기바이러스가 인체를 숙주로 삼는 질병이 아닌가.

과학 영역만 그러한 게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것이 ‘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식(常識)’ 또한 그러하다.

1776년 1월 10일 ‘펜실베이니아 매거진’의 기자 토머스 페인이 소책자를 출간했다. 페인은 이 책에서 “아메리카가 영국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립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영국 군주제를 넘어 완전한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새로운 아메리카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메리카는 종주국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메리카에 대한 영국 정부의 과도한 과세가 식민지 민중의 저항을 불렀다. 갈등은 커졌고, 급기야 이 책이 출간되기 9개월 전인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미국 독립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진행 중이었지만 모든 아메리카인이 독립을 원하지는 않았다. 적잖은 사람이 스스로를 영국인이라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의 허상을 페인의 이 책이 부쉈다. 책을 읽은 아메리카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던 독립 의지를 발견했다. 출간한 지 3개월 만에 10만 부가 팔려 나갔다.

이 책의 제목은 ‘Common Sense’. ‘상식’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내용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았다. 두려울 만큼 강한 도발이었다. 영국 정부가 불온한 선동서적으로 분류했음은 물론이다. 아메리카 지도자인 벤저민 프랭클린과 조지 워싱턴마저 페인의 주장이 과격하다고 여겼을 정도이니 당시의 상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페인의 주장이 상식이었음을 입증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혁명의 수준으로 격상됐고, 그 결과 미국이 역사상 첫 민주공화제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상식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인이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이다. 이 정의를 따르자면 페인의 도발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시대를 앞서도 한참 앞섰다. 그런데도 그의 도발이 상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공감과 지지가 상식의 숙주다. 바이러스가 숙주 없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그 어떤 고귀한 철학도 대중의 공감과 지지가 없으면 비(非)상식, 혹은 몰상식일 뿐이다.

최근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지켜보면서 비상식의 끝이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으로 볼 때 정치인들의 상식에 대한 기준은 자의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상식에 부합하고 객관적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남 탓,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인들의 ‘상식 지능’이 이렇게 처진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통합진보당 사태를 납득할 수 없다. 당권파는 끝내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거부했다. 상식이 갖춰야 할 조건을 버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비상식 덩어리’임을 선포한 셈이다. 그런 그들에게는 이제 이 시대의 정의(正義)를 논할 자격이 없다. 국민의 ‘상식’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통합진보당#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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